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나의 이야기] 지식과 삶과 교육

이 세상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꼭 두 가지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교사는 아주 적당한 직업이다. 지식을 가까이할 수 있고, 나 자신이 공부하는(즉,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교사는 공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인데 공교육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이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할 수 있다. 왜 공교육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요새 부쩍 많아진 것 같기 때문이다. 공교육이란 무엇인가? 공교육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개인이 알아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거기에 가서 배우도록 하지 않고 이러이러한 것을 가르쳐라, 학교는 어떻게 운영해라 하는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이유는, 의료기관을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게 의료에 관한 법을 만들고 보건소 같은 공공의료기관을 세운 이유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개인의 자선에만 맡기지 않고 복지에 관한 법을 만들고 공립 복지시설을 세운 이유와도 같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 문장은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인데, 말하자면 국가(정부)의 존재 이유를 말하고 있다(실제 이런 이유로 국가를 세웠다는 것은 아니고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선생은 각자 알아서 학원을 세우거나 가정교사로 취직하고, 자식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싶고 가르칠 능력이 되는 부모들은 자식을 학원에 보내거나 가정교사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잠깐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교육은 일부 계층이 독점한다. 교육을 받은 계층의 자녀들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그들끼리 서로 어울리고 교류하면서 학자가 되거나 사업을 하거나 관직에 진출한다.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나머지 가정의 자식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부모의 일을 돕거나 산업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따라서 재산을 모으는 것도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도 거의 원천 봉쇄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 벗을 수 없는 굴레가 됨을 의미한다. 공교육이 없었던 시절의 역사를 보거나, 지금도 공교육을 강제로 시행할 힘이 없는 일부 국가의 상황을 보면 명백한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가출 청소년이나 중퇴생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국가가 아무 일도 안하고 있으면 국민의 상당수가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다시 말해 배고픔을 채울 수 없거나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등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국가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고, 공교육이 그런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교사가 나에게 이처럼 좋은 직업이기는 하지만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세상을 이해하는 일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 기관사(내가 교사가 되지 못했을 때 택하려고 했던 직업)도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공부는 할 수 있고, 또한 지하철이라는 것도 오고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더욱 파괴된 환경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있었던 미래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있는 것 아닌가? 이처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는 사실상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비추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한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왜 위대한가?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공부에서도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빌 게이츠는? 돈을 많이 벌었을 뿐 그가 한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별로 위대하지 않다. 인터넷의 보급은 사회의 발전인가? 그렇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더 쉽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고 있으므로. 경제 발전을 위해 소비를 장려해야 하는가? 아니다. 자원낭비와 환경파괴로 미래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을 시장원리에 맡겨야 하는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의 탐욕을 채우는 대신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더해질 것이 확실하고, 특히 그로 인해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는 회화가 중요한가, 독해가 중요한가? 독해가 중요하다.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공부할 때 필요한 것이 그것이므로. 어떤 것이 옳은지, 또한 어떤 것이 가치 있는지 판단하는 나의 기준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과 대개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제 이러한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통해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현재 공교육은 제 구실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생각을 같이하지만 정작 그 이유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즉, 공교육이 학생들의 대학 시험 점수를 사교육만큼 못 올려주는 것을 가리켜 공교육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의 목적은 점수 올리기나 대학입시가 아닌데 왜 그것을 가지고 비교한단 말인가? 이것은 바둑 기사에게 왜 권투에서 권투선수를 못 이기냐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진짜 문제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에 속는 것인지 알고서도 그러는 것인지 ‘특목고, 자사고’에 간 학생이나 ‘인 서울’한 학생의 수에 연연하고 그 수를 늘리는 것을 학교의 최고 목표로 삼는 공교육 담당자들(교사, 교장, 심지어 교육감)이 많아지는 바람에 실제로 학교가 입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고통을 증가시킨다. 앞서 말한 나의 두 가지 기준으로 보면 ‘극악무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학생들이 고통 받고 있음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실제로 고통을 주는 것은 입시에서 뒤처지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고(이것은 어떤 학생에게 들은 말 그대로다)’, 따라서 입시에 자신의 미래 전체가 걸렸다고 믿는 그들 자신의 불안감과 공포감이다. 사교육 기관은 그런 마음을 부추겨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 한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홍보이고 마케팅이므로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담배회사처럼,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경우다). 학생들은 안 그래도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기 마련인데 사교육기관에 의해 그 불안감이 잔뜩 부풀려진 상태인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줄여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해 주면 된다. 그렇게까지 불안해하거나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 세상에는 경쟁에서 남을 이기는 것이나 잘 먹고 여행 많이 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일도 많다는 것, 그 중요한 것들을 찾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말해 주면 되는 것이다. 진실과 진짜 공부(세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사교육기관의 거짓말과 거짓 공부(문제유형 반복숙달)에 맞서는 것이 바로 공교육이 할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공교육기관이 사교육기관과 사실상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학교가 제 구실을 하려면 학원에 맞서 싸워 학생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하는데, 현실은 어느 쪽이 더 학생에게 고통을 많이 주는지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입시성적에 따라 학교가 망하거나 교장 또는 교사 월급이 깎이는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아무 이유 없이 자기네가 보호해야 할 국민에게 창을 들이댄다(이제는 그 이유를 만들어주겠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꿈이거나, 무슨 심시티같은 게임이었으면 좋겠다. 깨어나거나, ‘리셋’이라도 하게 말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의 경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 구조나 다른 내용들과의 관계 같은 것이 잘 파악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천재는 아니다. 윤리나 역사 같은 일부 과목은 이해가 잘 안 되어 시험 직전에 간신히 교과서 내용을 외우곤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싫었고 그래서 성적도 잘 안 나왔다. 과학처럼 역사도 수업 시간에 잘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잘 안 되었다. 그 때는 내가 과학에 소질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나중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중학생 때부터 백과사전과 교양서적을 통해 과학 분야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책의 내용은 대부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런 ‘배경 지식’이 그 분야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해 준 것이다. 비유하자면, 배경 지식은 바닷물 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그래서 떨어져 있는 섬들이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과학의 배경 지식은 지리, 음악, 국어 고전 등 다른 분야 과목의 공부에도 도움이 된 것 같은데 윤리나 역사와는 (그 때까지는) 잘 관련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학교 때(그 뒤로도 마찬가지) 교과에 관련도 없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책 읽을 시간은 많고 그 시간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책을 읽었던 이유는? 습관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왜 하필 과학이었나? 그것은 ‘취향’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런 경험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해 주었다. 내 경우의 윤리나 역사처럼 해서는 절대로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공부해야 한다. 독서의 습관, 교과 내용과 직접 관계가 없더라도 책을 (이왕이면 내용이 좋은 것으로) 많이 읽는 것, 새로 알게 되는 것을 이미 아는 것들과 이리저리 연결시켜 생각해 보는 것, 책에 있는 내용을 나 자신이나 주변 사물에 실제로 적용해 보는 것, 복잡하더라도 파고들면서 생각하는 것,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책 뒤의 해답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다), 아는 것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글로 표현해 보는 것 등이다. 설령 다른 학생이 나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공부했는데 성적이 나보다 훨씬 잘 나왔다고 해도, 나는 내가 했던 방법이 맞다는 생각을 안 바꿀 것이다. 그것이 성적을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진짜 공부’는 장기적으로는 성적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을 이루게 했고, 그렇게 공부한 지식은 나의 일부가 되고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여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가정을 꾸린 다음에는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는데, 차, 에어컨, 사교육 등 ‘돈 먹는 하마’들을 안 키울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고 인터넷 자료를 뒤지며, 혹은 글을 쓰며 공부를 한다. 거기서 새로 알게 된 내용은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의 그물’에 연결되어 내가 세상을 조금 더 넓게,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내가 보기에 공부의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지금 많은 학생들이 하고 있는 것은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 유형을 반복숙달하는 일일 뿐이고, 공부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아직 학생인데 항간에 떠도는 ‘괴담’에서처럼 책 읽을 시간도 없이 학원을 다녀야 하고, 공부(물론 시험에 나오는 과목)를 잘 하는지 감시당하고 관리당하는 생활을 한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학원에서는 입시 문제유형을 나열하고 하나씩 푸는 방법을 반복숙달시켜 줄 것이고, 학교는 그 흉내를 낸다. 섬만 보이고 그것들을 연결시켜 주는 바다 밑의 땅은 보지 못한다. 섬을 하나씩 외운다. 공부(라고 불리는 활동) 자체가 지겹지만 뒤처지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 한다니 할 수 없이 한다. 지식 속에 숨어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 가치관은 공백이 되고 탐욕이 대신한다(즉,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에 간다. 지겹지만 그 방법밖에 모르므로 취업을 위해 또 그런 문제유형 반복숙달식 공부를 한다. 취업을 한다. 나머지 인생도 탐욕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지겨운 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 방법밖에 모르므로 자식들을 학원에 보내고, 감시하고, 관리한다. 지겨움과 탐욕으로 채워진 인생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어 교과서에서 어떤 글을 읽고, 또는 인터넷 블로그에서 어떤 글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저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이 사교육의 독성을 중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고통 받는 사람은 계속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사교육이 돈벌이에 욕심내지 않고 학교 공부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도와주는 정도의, ‘사교육의 원래 기능’에 만족하면 여러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바둑을 두는데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 집을 채우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일을 제대로 하고 싶다. 제대로 공부하고, 지식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찾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더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학생들을 돕고 싶다. 그런데 교육이라는 이 게임에서 나의 적은 너무 많다. 학교 밖에도, 안에도, 교육청에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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