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교육] 독서교육 - 왜, 그리고 어떻게?

독서는 그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이며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책을 읽음으로써 수학 교과서의 내용을 학습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독서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독서를 통해 얻는 것은 화려한 꽃이나 맛 좋은 열매가 아니라, 튼튼한 뿌리에 해당하지 않을까?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보다도,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상상력, 문제 해결 능력 등, 정신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이 독서의 역할이다. 독서를 통해 수학을 더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기초체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특정한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서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훨씬 중요한, 독서의 원래 기능을 잊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독서는 개인적인 활동이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집단적으로 특정한 책의 내용을 공부하는 경우 그 책은 교과서라 불려야 하고, 그 활동은 독서가 아니라 수업이나 세미나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독서교육’이란 말은 스스로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독서교육은 무엇인가? 즉, 독서교육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활동인가? 독서교육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지속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들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독서교육의 내용이란 독서할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는 일, 그리고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일 정도일 것이다. 그것을 넘는 욕심은 문제를 일으킨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독서교육 관련 소책자에서 본 것인데, 이런 권리들을 학생이나 자녀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저 권리들을 침해하지 않으려면, 독서교육은 좋은 책에 대한 소개, 독서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 독서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등에 그쳐야 한다. 특정한 책이나 특정한 분야의 책을 ‘읽도록 만들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열 가지 권리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군데군데 골라서 읽을 권리
소리 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보바리즘(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공상)을 누릴 권리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중 -

따라서 독서교육은 매우 모호한 활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육이라고 하면 학생들에게 직접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깨닫게 하는 활동이라는 고정관념으로는 독서교육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독서교육은 눈에 보이는 곳, 손이 닿는 곳에 좋은 책이 항상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책이 가까이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학교의 경우 학생이 가장 많이 다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도서관이 있어야 하며, 분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학생들이 자유롭게 책을 열람하고 대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실에도 좋은 책들을 비치하고 계속 ‘업데이트’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투자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는, 좋은 책을 소개하고 빌려주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이런 것도 분명히 ‘교육’의 한 방법이고 그래서 도서관이 교육기관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교육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첫째 오류는, 독서를 특정한 분야의 공부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독서는 정신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이다. 특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그 과목 공부라고 불러야지, 독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독서의 본질을 특정 지식의 획득인 것으로 호도하기 때문이다. 수학에 독서를 접목시키려는 노력은 바람직하지만, 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수학 분야의 좋은 책을 읽음으로써 전체적인 수학적 소양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 두어야 한다. 독서가 수학 공부의 수단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서는 수학 같은 특정 과목 공부보다 더 중요하거나, 적어도 다른 것의 수단이 되어도 좋을 정도로 덜 중요하지는 않다.

두 번째 오류는, 독서의 양과 질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책을 소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서 독서의 양을 늘리고 질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까지는 좋으나, 직접적으로 학생들의 독서에 간섭하는 방식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읽으라고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요한다든지, 이 책꽂이에 있는 책을 다 읽으라고 한다든지, 일주일에 몇 권 이상 꼭 읽으라고 한다든지, 읽은 책에 대해서 꼭 독후감 등을 쓰라고 한다든지 하는 일이 그렇다. 이런 식의 간섭이나 강요는 지적인 폭력일 뿐만 아니라, 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지속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들게 한다는, 독서교육의 목적과 정면충돌한다(일반적으로, 강요는 나쁘다).

세 번째 오류는 독서의 성과를 단시간 안에 양적으로 측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독서의 성과는 특정 과목 공부의 성과보다도 더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그 성과라는 것도 내면의 변화 같은 애매한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에 ‘점수’를 매기고, 결과적으로 ‘등수’까지 매기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 독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독서를 제대로 해 본 적조차 없는 자들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독자들도 자기가 책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리라고 생각한다.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수많은 책들, 다 읽기도 하고, 읽다 말기도 하고, 건너뛰면서 군데군데 읽기도 하고, 가끔 틈틈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림만 보고 말기도 한 그 책들을 통해 얻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지식, 깨달음, 감동, 사고방식의 전환 ... 이런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얽히고설켜 지금의 나를 만든 것 아닌가? 그런 독서의 효과를, 읽은 권수나 그 책을 읽고 나서 쓴 독후감 같은 것으로 측정해서 점수로 환산하려고 하다니... 마치 인간 자체를 점수로 환산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은 독서교육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독서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데, 물론 학교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상황 항목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체는 바람직할 수 있다. 학생의 독서활동을 파악하면 학생의 관심 분야를 알 수 있기 때문에 학생과 대화의 물꼬를 틀수도 있고, 바람직한 독서에 대한 조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상급학교 입시에 평가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도 입시에 반영되면 곧바로 입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입시에 반영되지 않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독서활동이 상급 학교 입시에서 ‘평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독서 자체가 아닌 독서활동상황란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될 것이고, 봉사활동이 그랬던 것처럼 교사와 학생에게서 막대한 시간을 빼앗는 한편 이름에 정확히 반대되는 효과를 갖는 반교육적 장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인가,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인가? 많은 사람이 당연히 살기 위해 먹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고, 먹는 것은 그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실제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먹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사람도 말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받는 것인가? 어떤 이는 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장사가 되었건 교육이 되었건 그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그 일을 계속하면서 생활하기 위해서 돈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말에는 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직업으로서 하는 일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어느 것이 목적이고 어느 것이 그것을 위한 수단인가,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이 어느 것이고 덜 중요한 것이 어느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가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관은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일에 임하는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인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가? 공부와 대학(학벌)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에 따라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수준별 이동수업, 전국일제고사, 교육과정 개정 등 현안에 대한 입장을 가르는 것도 결국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 곧 가치관이다.

독서교육을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역시 가치관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교육은 문학, 역사, 수학, 과학과 같은 학문의 가치를 오직 (될 수 있으면 알아주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린 전과가 있다. (물론 그것은 농업, 공업, 서비스업을 막론하고 모든 직업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이 사회의 경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과목 공부뿐만 아니라 자치활동, 클럽활동, 봉사활동 같은 것마저도 입시의 수단으로 만들어서 본질과 무관하게 변질시키고 있는데, 어찌 생각하면 그 재주가 신기하기도 하다. 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이라는 항목이 들어가게 된 지금, 독서가 입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닐까 하는, 매우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런 사태를 막고 정상적인 독서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독서가 무엇인지, 왜 그것이 필요하고 학교에서 독서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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