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책] 삼엽충 - 느린 과학의 세계

제목: 삼엽충(Trilobite!)
저자: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
출판사: 뿌리와이파리

화석으로만 남아있는, 절지동물(절지동물문)의 한 '강'을 이루고 있는 삼엽충의 과학적 의미를 해설하면서, 삼엽충학(넓게는 고생물학)이라는 과학 연구의 역사, 삼엽충학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 등을 곁들인 대중 과학서이다.

나는 삼엽충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또한 삼엽충이 표준화석으로서 지층이 만들어진 연대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이 책을 통해서 알았다. 다시 말해, 삼엽충에 관련한 내 지식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이 책으로 약간 넓어진 것이다.

삼엽충은 절지동물문 삼엽충강에 속한 해양동물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며, 크기는 벼룩만한 것으로부터 전갈만한 것까지 다양했다.

'포유류' 도 강(척삭동물문 포유강)을 이룬다. 포유류의 크기 역시 뒤쥐(길이 6cm)부터 고래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포유류가 살아가는 방식이 치타처럼 빠른 사냥꾼에서부터 나무늘보처럼 느린 채집자, 날아다니는 박쥐, 바다를 누비는 고래, 심지어 희한한 것들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는 인간 등으로 다양한 것처럼, 삼엽충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았다. 얕은 바다의 모래 위를 바삐 기어다니는 삼엽충, 깊은 바다의 진흙 속, 산소가 거의 없는 곳에서 화학합성 세균과 공생하던 삼엽충, 바다를 헤엄치며 플랑크톤을 먹던 삼엽충 등으로 말이다.

화석만으로 이런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수많은 '삼엽충학자'들이 화석을 발굴하고, 그림을 그리고, 논문을 쓰고, 목록을 만들고, 비교하는 등의 노력을 끈질기게, 오랜 세월에 걸쳐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었기 때문에 대륙이동에 대한 연구 같은 데에 삼엽충 화석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삼엽충에는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 삼엽충은 3억 년에 걸친 고생대 내내 지각의 운동(바다가 육지가 되고, 대륙이 움직이는 등), 기후 변화, 대멸종 같은 지구의 역사를 지켜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연결고리는 별로 알려지지 않다가 어느날 갑자기 학계의 주목을 받는 연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삼엽충의 눈에 대한 설명이다. 삼엽충의 수정체는 방해석으로 되어 있다. 방해석은 순수한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결정이다. 탄산칼슘은 석회암의 주성분으로 종유석, 석순 같은 것을 이루는 물질이다. 삼엽충의 수정체는 투명한 돌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그래서 화석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방해석은 복굴절이라는 광학적 특징을 갖는데, 복굴절은 들어오는 빛을 두 성분으로 갈라 각각 다른 방향으로 꺾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방해석을 통해 사물을 보면 보통 두 개로 보인다. 대부분의 삼엽충의 수정체는 방해석 결정에서 복굴절이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방향으로 빛이 통과되도록, 가늘고 긴 방해석 기둥 수천 개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의 삼엽충(파콥스 아과)의 수정체는 방해석을 둥글게 만들어 볼록렌즈 역할을 하게 하되, 두 종류의 광물(방해석과, 고마그네슘 방해석)을 교묘하게 배치해 초점을 제대로 맞출 수 있도록 만든, 광학적으로 경이적인 작품이다. 인간의 눈에 비해서도 결코 원시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구조이다. 파콥스는 약 4억년 전에 살았던, 크기가 3cm 정도 되는 벌레 비슷한 동물이었는데 말이다. 이것은, 나중에 등장한 생물의 몸이 꼭 더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파콥스는 일반적인 삼엽충의 방해석 눈을 출발점으로 하였고 뚜렷이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환경에서 살았기에 그런 정교한 눈을 갖도록 진화했다. 하지만 고생대 데본기 말에 멸종하여 그 정교한 눈 구조는 이어지지 않았다. 삼엽충 전체는 페름기 말에 멸종하였다(페름기 말에는 모든 생물의 90%가 멸종했다). 지금 살아남아 있는 동물들 중에는 삼엽충의 방해석 눈을 이어받은 것은 없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눈은 삼엽충과는 독립적으로 발달해 온 것이다.

삼엽충이라는 한정된 소재를 가지고 자세히(저자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엄청나게 요약한 것이겠지만) 파고들어가면서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이 책은 다른 데서 접하기 어려운 많은 흥미로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과학 서적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별로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곳곳에 유머를 섞어 놓았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고생물학자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책으로 '핀치의 부리(The Beak of the Finch, 조너던 와이너, 이끌리오)'를 읽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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