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책] 클라우드 아틀라스 - 문명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요즘 소설을 잘 안 읽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되면서 다른 일에 지장을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삶이 더 각박해졌다고나 할까?  그래도 오랜만에 <클라우드 아틀라스>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어떤 분이 구글플러스(Google+)에 이 책이 영화화된다는 소식과 함께 이 작품의 특이한 구성에 대해서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읽게 된 것은 구성 방식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형식은 껍데기이고 포장일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 그리고 거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것일 것이다.

제목: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저자: 데이비드 미첼(David Mitchell)
역자: 송은주
출판사: 문학동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섯 편을 연관지은 방식이 특이하다.  우선 각각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모두 어깨에 혜성 모양의 반점을 갖고 있으며, '구름의 지도책(클라우드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대상이 등장한다.  각각의 주인공과 각각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사이에 별다른 일관된 점은 없다.  여기까지는 별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지만 여섯 편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 특이하면서도 흥미롭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항해일지의 형태인데 중간에 느닷없이 끊겨버리고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두 번째 이야기는 편지글의 형태인데, 첫 번째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책이 파본이어서 이야기가 중간에 끊겨 있고, 그 끊긴 곳이 바로 이 책에서 첫번째 이야기가 끊긴 그 곳이다.  어쨌든 두 번째 이야기인 편지글도 진행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중단되고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세 번째 이야기는 보통의 소설 형태로 되어 있다(해설에 의하면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음).  두 번째 이야기는 여기에서 누군가(즉,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가 남긴 편지뭉치의 형태로 등장하며, 손에 넣은 것이 어느 시점까지의 편지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끊어진 것이다.  한편 세번째 이야기는 자체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다가 역시 중단되고 네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네 번째 이야기는 수필처럼 보이는데 영화화를 겨냥하여 자신의 경험담을 써 놓은 것처럼 되어 있다.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는 소설책의 형태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2권 중 1권밖에 구하지 못해서 거기까지만 읽은 것이다.  한편 네 번째 이야기도 잘 나가다가 중간에서 끊기고 다섯 벗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어떤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을 심문하는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의 대화 내용이다. (이 동영상은 '오리진'이라는 알 모양의 장치에 저장되어 있는데, 오리진은 동영상을 재생하는 기능도 있다. PMP같은 것인가 보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한국'이다.  네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이 우연히 보게 된 영화로 등장하고,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네 번째 이야기가 끊겨 있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못 보게 된 것이다.  다섯번째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하며 전개되다가 역시 중간에 끊기고 여섯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전쟁으로 문명이 파괴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이 사는 곳은 가진 것 없이 어렵게 살지만 인간성을 회복하여 서로 도우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공동체인데, 어느날 바다 건너의 발달된(파괴 이전의 상태와 더 가깝게 회복된) 문명의 세계에서 '특사'가 파견되어 같이 지내게 된다.  이 특사는 휴대용 동영상 재생기인 오리진을 갖고 있는데, 주인공(마을 원주민)이 우연히 오리진을 조작하다가 다섯 번째 이야기인 그 동영상을 재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들켜서 다 보지 못한다.  이야기는 유일하게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데, 결국 첫 번째 이야기와 비슷하게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반복된다.  어쨌든 여섯번째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주인공이 미처 다 보지 못했던, 오리진에 들어있던 동영상을 마저 보게 된다.

그리하여 중단되었던 다섯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진술을 계속하고, 다 마친 후에 전에 보다 중단했던 그 영화를 보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네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흥미진진한 모험을 마치고 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제2권을 구하여 읽는다.

그렇게 세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사건을 해결하고 나머지 편지들을 찾아내어 읽는다.

그것으로 두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여러 일들을 겪은 후에 주인공은 파본으로 뒷부분을 읽을 수 없었던 책을 다시 구해서 나머지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렇게 첫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지고 결말을 맺는다.


원래는 여섯 번째 이야기 안에 다섯 번째 이야기가, 그 안에 네 번째 이야기가 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액자들의 안팎을 뒤집어버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가끔 느끼는 것인데, 소설가들이 창의적이긴 한 것 같다.  그냥 여섯 편을 모아 놓았으면 이 책이 이런 관심을 받지는 못했을 것인데,  창의적인 구성으로 독자의 흥미를 더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형식과는 별도로, 내용 중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다섯번째 이야기였다.  배경이 '한국'이기도 했고, SF인데다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전개되어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내용은 씁쓸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국은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단점만 모아놓은 것같은 곳이다.  남한의 착취경제와 북한의 통제사회가 결합된 디스토피아...  보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설정은 전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Moon>이라는 영화(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더 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었다)에도 규모는 훨씬 작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영화의 배경은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달 기지였다.  외국에서 한국은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는 사회' 정도로 비춰지는 것인가 싶다.

이 책 전체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지만, 쉽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꼭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드는 생각은, 모든 이야기에서 일종의 '노예'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가까운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19세기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에서부터,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했다고 여겨지는 가까운 미래, 심지어 그 문명이 무너지고 나서도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것을 폭력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는 계속된다.  문명이 발달하면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실상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착취하는 기술이 오히려 더 정교해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못하면서 힘들게 일을 해도 겨우 먹고살기도 어려운 사람들. 노예같은 삶이 분해서 '주인'에게 대들면 그 주인은 해고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주변사람들까지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는, 신식 채찍을 휘두른다.  남태평양의 미개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공격하여 노예로 삼고서 물리적인 재찍을 휘두르던 데서 무엇이 나아졌을까?  이런 식의 변화는 발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착취', '노예' 같은 것으로 가리킬 대상이 없어졌을 때야말로 문명은 겨우 첫걸음을 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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