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What Money Can't Buy)
지은이: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옮긴이: 안기순
출판사: 와이즈베리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내 나름대로 한 단어로 표현하면 '외부효과'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이 용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내 생각에 그렇다는 것이다.
서로의 합의에 의한 '거래'는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한 쪽이라도 손해를 본다면 거래를 안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거래를 보장하면 보장할수록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오류인 이유는, 거래는 거래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래로 인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나 사회 전체에 주어지는 영향, 그것을 '외부효과'라고 한다.
예를 들어, 지하수를 퍼올려서 병에 넣어 팔면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에게는 이익이 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자유롭게 허용하면 지하수가 고갈되어 그 지역에 식수난이 오거나 땅이 내려앉아 많은 사람들이 큰 곤란을 겪게 된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하루 얼마 이상 퍼올리지 못하게 한다든지 하는 '규제'가 필요하다. 즉, 자유시장에만 맡겨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석유를 퍼올려서 파는 회사, 석유를 정제하여 휘발유로 만들어 파는 회사, 그 휘발유를 사서 차에 넣고 몰고 다니는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거래로 인해 그 당사자들은 이익을 볼 수 있겠지만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인류 전체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자유시장을 절대선인양 찬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어떤 재화나 서비스는 자유로운 거래의 대상이 되면 그 가치가 타락한다는 것인데(책에서는 '부패'라는 말을 썼는데, 타락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이것도 '외부효과'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콩팥(신장)의 거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자유시장주의에 입각하면, 기증자가 콩팥을 경매에 붙이는 것이 가장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콩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공급'하고, 기증자(이 경우 기증자라는 말이 부적당하겠지만)에게 가장 큰 보상을 하는 방법이 아닐까? 맞다. 거래 당사자만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 거래의 외부효과를 생각해 보면 어떤가? 이런 거래가 허용된다면 부자들은 쉽게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이식할 장기를 공급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인데, 사람들이 이런 상태를 납득할 수 있는가? 아마도 사회 불안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예로, 인구 억제를 위해 여자 한 명당 2명의 자녀를 출산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범죄로 간주하는 경우와, 여자 한 명당 2개의 출산권을 주고 이를 시장가격에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자. 인구 억제 효과는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출산권 시장이 있는 경우 부자들은 출산권을 사들여 더 많은 자녀를 낳을 수 있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더 많은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되어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역시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 사회 전체에 바람직하지 않은 '외부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든 예로 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운동경기장의 '스카이박스(luxury skybox)'였다. 전에는 대기업 임원과 일반 노동자가 똑같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바로 옆에 앉아서 함께 응원하며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돈을 많이 내는 회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 관람석인 스카이박스가 생기면서, 구단의 수입과 회원들의 만족도는 올라갔겠지만 운동경기 관람이라는 사회적 행위가 갖고 있던 사회통합의 효과는 사라지고 오히려 부자와 일반인의 이질감을 키우는 바람직하지 않은 '외부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무엇이든지 자유시장거래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장사꾼들이 판치고 있다. 하지만 효율성이니 경제성장이니 하는 그들의 주장을 한 꺼풀 벗기면, 사회 통합이나 인권, 평화 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희생시켜 돈을 벌려는 그들의 장삿속이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장사꾼들에게 속아 중요한 것들을 빼앗겨 왔다. 이제 여기서 더 이상 가면 사회가 버티지 못할 지경까지 가고 있다. 자유시장의 이러한 문제점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그러한 시도에 대해 확실히 '안 돼!'라고 외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책] 클라우드 아틀라스 - 문명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요즘 소설을 잘 안 읽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되면서 다른 일에 지장을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삶이 더 각박해졌다고나 할까? 그래도 오랜만에 <클라우드 아틀라스>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어떤 분이 구글플러스(Google+)에 이 책이 영화화된다는 소식과 함께 이 작품의 특이한 구성에 대해서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읽게 된 것은 구성 방식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형식은 껍데기이고 포장일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 그리고 거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것일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섯 편을 연관지은 방식이 특이하다. 우선 각각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모두 어깨에 혜성 모양의 반점을 갖고 있으며, '구름의 지도책(클라우드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대상이 등장한다. 각각의 주인공과 각각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사이에 별다른 일관된 점은 없다. 여기까지는 별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지만 여섯 편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 특이하면서도 흥미롭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항해일지의 형태인데 중간에 느닷없이 끊겨버리고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두 번째 이야기는 편지글의 형태인데, 첫 번째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책이 파본이어서 이야기가 중간에 끊겨 있고, 그 끊긴 곳이 바로 이 책에서 첫번째 이야기가 끊긴 그 곳이다. 어쨌든 두 번째 이야기인 편지글도 진행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중단되고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세 번째 이야기는 보통의 소설 형태로 되어 있다(해설에 의하면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음). 두 번째 이야기는 여기에서 누군가(즉,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가 남긴 편지뭉치의 형태로 등장하며, 손에 넣은 것이 어느 시점까지의 편지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끊어진 것이다. 한편 세번째 이야기는 자체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다가 역시 중단되고 네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네 번째 이야기는 수필처럼 보이는데 영화화를 겨냥하여 자신의 경험담을 써 놓은 것처럼 되어 있다.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는 소설책의 형태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2권 중 1권밖에 구하지 못해서 거기까지만 읽은 것이다. 한편 네 번째 이야기도 잘 나가다가 중간에서 끊기고 다섯 벗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어떤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을 심문하는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의 대화 내용이다. (이 동영상은 '오리진'이라는 알 모양의 장치에 저장되어 있는데, 오리진은 동영상을 재생하는 기능도 있다. PMP같은 것인가 보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한국'이다. 네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이 우연히 보게 된 영화로 등장하고,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네 번째 이야기가 끊겨 있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못 보게 된 것이다. 다섯번째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하며 전개되다가 역시 중간에 끊기고 여섯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전쟁으로 문명이 파괴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이 사는 곳은 가진 것 없이 어렵게 살지만 인간성을 회복하여 서로 도우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공동체인데, 어느날 바다 건너의 발달된(파괴 이전의 상태와 더 가깝게 회복된) 문명의 세계에서 '특사'가 파견되어 같이 지내게 된다. 이 특사는 휴대용 동영상 재생기인 오리진을 갖고 있는데, 주인공(마을 원주민)이 우연히 오리진을 조작하다가 다섯 번째 이야기인 그 동영상을 재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들켜서 다 보지 못한다. 이야기는 유일하게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데, 결국 첫 번째 이야기와 비슷하게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반복된다. 어쨌든 여섯번째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주인공이 미처 다 보지 못했던, 오리진에 들어있던 동영상을 마저 보게 된다.
그리하여 중단되었던 다섯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진술을 계속하고, 다 마친 후에 전에 보다 중단했던 그 영화를 보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네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흥미진진한 모험을 마치고 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제2권을 구하여 읽는다.
그렇게 세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사건을 해결하고 나머지 편지들을 찾아내어 읽는다.
그것으로 두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여러 일들을 겪은 후에 주인공은 파본으로 뒷부분을 읽을 수 없었던 책을 다시 구해서 나머지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렇게 첫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지고 결말을 맺는다.
원래는 여섯 번째 이야기 안에 다섯 번째 이야기가, 그 안에 네 번째 이야기가 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액자들의 안팎을 뒤집어버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가끔 느끼는 것인데, 소설가들이 창의적이긴 한 것 같다. 그냥 여섯 편을 모아 놓았으면 이 책이 이런 관심을 받지는 못했을 것인데, 창의적인 구성으로 독자의 흥미를 더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형식과는 별도로, 내용 중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다섯번째 이야기였다. 배경이 '한국'이기도 했고, SF인데다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전개되어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내용은 씁쓸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국은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단점만 모아놓은 것같은 곳이다. 남한의 착취경제와 북한의 통제사회가 결합된 디스토피아... 보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설정은 전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Moon>이라는 영화(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더 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었다)에도 규모는 훨씬 작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영화의 배경은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달 기지였다. 외국에서 한국은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는 사회' 정도로 비춰지는 것인가 싶다.
이 책 전체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지만, 쉽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꼭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드는 생각은, 모든 이야기에서 일종의 '노예'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가까운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19세기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에서부터,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했다고 여겨지는 가까운 미래, 심지어 그 문명이 무너지고 나서도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것을 폭력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는 계속된다. 문명이 발달하면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실상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착취하는 기술이 오히려 더 정교해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못하면서 힘들게 일을 해도 겨우 먹고살기도 어려운 사람들. 노예같은 삶이 분해서 '주인'에게 대들면 그 주인은 해고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주변사람들까지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는, 신식 채찍을 휘두른다. 남태평양의 미개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공격하여 노예로 삼고서 물리적인 재찍을 휘두르던 데서 무엇이 나아졌을까? 이런 식의 변화는 발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착취', '노예' 같은 것으로 가리킬 대상이 없어졌을 때야말로 문명은 겨우 첫걸음을 떼는 것이 아닐까.
제목: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저자: 데이비드 미첼(David Mitchell)
역자: 송은주
출판사: 문학동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섯 편을 연관지은 방식이 특이하다. 우선 각각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모두 어깨에 혜성 모양의 반점을 갖고 있으며, '구름의 지도책(클라우드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대상이 등장한다. 각각의 주인공과 각각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사이에 별다른 일관된 점은 없다. 여기까지는 별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지만 여섯 편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 특이하면서도 흥미롭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항해일지의 형태인데 중간에 느닷없이 끊겨버리고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두 번째 이야기는 편지글의 형태인데, 첫 번째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책이 파본이어서 이야기가 중간에 끊겨 있고, 그 끊긴 곳이 바로 이 책에서 첫번째 이야기가 끊긴 그 곳이다. 어쨌든 두 번째 이야기인 편지글도 진행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중단되고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세 번째 이야기는 보통의 소설 형태로 되어 있다(해설에 의하면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음). 두 번째 이야기는 여기에서 누군가(즉,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가 남긴 편지뭉치의 형태로 등장하며, 손에 넣은 것이 어느 시점까지의 편지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끊어진 것이다. 한편 세번째 이야기는 자체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다가 역시 중단되고 네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네 번째 이야기는 수필처럼 보이는데 영화화를 겨냥하여 자신의 경험담을 써 놓은 것처럼 되어 있다.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는 소설책의 형태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2권 중 1권밖에 구하지 못해서 거기까지만 읽은 것이다. 한편 네 번째 이야기도 잘 나가다가 중간에서 끊기고 다섯 벗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어떤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을 심문하는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의 대화 내용이다. (이 동영상은 '오리진'이라는 알 모양의 장치에 저장되어 있는데, 오리진은 동영상을 재생하는 기능도 있다. PMP같은 것인가 보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한국'이다. 네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이 우연히 보게 된 영화로 등장하고,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네 번째 이야기가 끊겨 있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못 보게 된 것이다. 다섯번째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하며 전개되다가 역시 중간에 끊기고 여섯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전쟁으로 문명이 파괴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이 사는 곳은 가진 것 없이 어렵게 살지만 인간성을 회복하여 서로 도우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공동체인데, 어느날 바다 건너의 발달된(파괴 이전의 상태와 더 가깝게 회복된) 문명의 세계에서 '특사'가 파견되어 같이 지내게 된다. 이 특사는 휴대용 동영상 재생기인 오리진을 갖고 있는데, 주인공(마을 원주민)이 우연히 오리진을 조작하다가 다섯 번째 이야기인 그 동영상을 재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들켜서 다 보지 못한다. 이야기는 유일하게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데, 결국 첫 번째 이야기와 비슷하게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반복된다. 어쨌든 여섯번째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주인공이 미처 다 보지 못했던, 오리진에 들어있던 동영상을 마저 보게 된다.
그리하여 중단되었던 다섯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진술을 계속하고, 다 마친 후에 전에 보다 중단했던 그 영화를 보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네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흥미진진한 모험을 마치고 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제2권을 구하여 읽는다.
그렇게 세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사건을 해결하고 나머지 편지들을 찾아내어 읽는다.
그것으로 두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여러 일들을 겪은 후에 주인공은 파본으로 뒷부분을 읽을 수 없었던 책을 다시 구해서 나머지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렇게 첫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지고 결말을 맺는다.
원래는 여섯 번째 이야기 안에 다섯 번째 이야기가, 그 안에 네 번째 이야기가 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액자들의 안팎을 뒤집어버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가끔 느끼는 것인데, 소설가들이 창의적이긴 한 것 같다. 그냥 여섯 편을 모아 놓았으면 이 책이 이런 관심을 받지는 못했을 것인데, 창의적인 구성으로 독자의 흥미를 더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형식과는 별도로, 내용 중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다섯번째 이야기였다. 배경이 '한국'이기도 했고, SF인데다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전개되어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내용은 씁쓸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국은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단점만 모아놓은 것같은 곳이다. 남한의 착취경제와 북한의 통제사회가 결합된 디스토피아... 보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설정은 전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Moon>
이 책 전체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지만, 쉽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꼭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드는 생각은, 모든 이야기에서 일종의 '노예'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가까운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19세기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에서부터,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했다고 여겨지는 가까운 미래, 심지어 그 문명이 무너지고 나서도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것을 폭력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는 계속된다. 문명이 발달하면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실상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착취하는 기술이 오히려 더 정교해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못하면서 힘들게 일을 해도 겨우 먹고살기도 어려운 사람들. 노예같은 삶이 분해서 '주인'에게 대들면 그 주인은 해고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주변사람들까지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는, 신식 채찍을 휘두른다. 남태평양의 미개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공격하여 노예로 삼고서 물리적인 재찍을 휘두르던 데서 무엇이 나아졌을까? 이런 식의 변화는 발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착취', '노예' 같은 것으로 가리킬 대상이 없어졌을 때야말로 문명은 겨우 첫걸음을 떼는 것이 아닐까.
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책] 크로마뇽 -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들
제목: 크로마뇽(Cro-Magnon: How the Ice Age Gave Birth to the First Modern Humans)
지은이: 브라이언 페이건(Brian M. Fagan)
출판사: 더숲
<지구에서 온 사나이(the Man from Earth)>라는 영화에는 크로마뇽인이 어떤 이유로 현대까지 살아있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우리도 크로마뇽인이다. 비록 우리가 '크로마뇽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주로 수만 년 전에 동굴이나 허술한 천막에서 살면서 사냥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일컫지만, 그들은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신체 구조와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크로마뇽인 아기를 현대에 데려와서 키우면 현대인과 다를 바 없이 잘 살 것이다. 또한, 지금도 지구상에는 수만 년 전과 별 다름 없이 살고 있는 '크로마뇽인'들이 있다. '크로마뇽인'과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이유는 그동안 축적된 지식과 사회제도, 문화 같은 것이 우리에게 그들과 다른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이 책(<크로마뇽>)에서는 크로마뇽인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사냥을 해서 살아갔으며, 빙하기에도 살던 곳에서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순록 같은 동물을 사냥하며 살았다. 다른 종인 네안데르탈인과 같이 살아가기도 했지만, 네안데르탈인은 결국 멸종했고 크로마뇽인만 살아남았다.
이 책에서는 크로마뇽인들의 기술적, 예술적인 능력이 현대인과 다름 없었다는 증거를 많이 볼 수 있다. 나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의 과학기술, 그들이 쓰던 도구들이다. 나는 '뗀석기'라는 것이 그냥 돌을 아무렇게나 깨뜨려 모양에 맞게 이용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상당히 계획적으로 만든 도구였으며, 뗀석기의 좋은 재료가 되는 돌을 찾기 위해 매우 멀리까지 가거나, '무역'을 하기도 했다. 정교한 석기를 써서 뼈나 뿔을 쪼개고 다듬어 화살촉이나 낚싯바늘, 심지어 옷을 만드는, 귀가 있는 바늘도 만들었다. 이 책에 의하면 크로마뇽인을 번영하게 해 준 두 개의 기술 혁신은 바로 '투창기'와 '귀가 있는 바늘'이다.
투창기는 멀리서도 창을 던질 수 있게 해서 사냥 도중에 죽거나 중상을 입는 사람들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매머드같은 대형 초식동물이 멸종한 것도 투창기로 무장한 인간들의 '대량학살' 때문으로 생각된다.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나타나고 천년 남짓한 기간에 남북아메리카 전역에서 대형 동물이 모두 사라졌고, 이들이 내뱉는, 강력한 온실효과를 갖는 메탄이 감소하여 빙하기가 왔다는 말도 있다.
귀가 있는 바늘은 가죽으로 만든 옷을 몸에 맞게 만들어 여러 겹으로 겹쳐 입을 수 있게 함으로써 추운 날씨에도 활동할 수 있게 했고, 이 때문에 크로마뇽인의 거주 지역은 매우 넓어졌다.
우리 집에 <아이스 에이지>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DVD가 있는데, 거기서는 이미 멸종한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매머드, 검치호랑이, 땅나무늘보(megalonyx), 그리고 '인간'이다. DVD 해설에서는 이 인간이 네안데르탈인이라고(따라서 역시 멸종한 동물이라고) 나오지만, 이 책에서 얻은 정보에 비추어 옷이나 도구, 장신구, 그리고 벽화를 그리는 등의 생활 양식을 가지고 판단해 보건대 영화 속의 인간은 크로마뇽인에 가깝다.
크로마뇽인은 생각보다 우리와 가깝고,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실 우리의 행동양식은 협동해서 사냥을 하던 크로마뇽인에게 더 적합한 것이 많이 있다. 미술도 그들의 것에 뿌리를 둔 것은 명확하다. 남아있지 않아서 그렇지 음악도 그럴 것이다. 크로마뇽인이 사용하던 창과 투창기가 발달해 화살과 활이, 포탄과 대포가, 총알과 총이 만들어진 것이고, 현대의 바늘이나 낚싯바늘 같은 것은 재료만 바뀌었지 크로마뇽인이 사용한 것에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고고학 역시 현재의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죽은 것을 파헤쳐 기록하는 활동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크로마뇽인 시절에도 기술혁신이 있었고, 문화의 전파가 있었고, 환경파괴도 있었으며, 그들도 우리처럼 낙서도 하고 '쓸데없는' 물건을 만들기도 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이상하게 친근하게 느껴진다.
지은이: 브라이언 페이건(Brian M. Fagan)
출판사: 더숲
<지구에서 온 사나이(the Man from Earth)>라는 영화에는 크로마뇽인이 어떤 이유로 현대까지 살아있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우리도 크로마뇽인이다. 비록 우리가 '크로마뇽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주로 수만 년 전에 동굴이나 허술한 천막에서 살면서 사냥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일컫지만, 그들은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신체 구조와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크로마뇽인 아기를 현대에 데려와서 키우면 현대인과 다를 바 없이 잘 살 것이다. 또한, 지금도 지구상에는 수만 년 전과 별 다름 없이 살고 있는 '크로마뇽인'들이 있다. '크로마뇽인'과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이유는 그동안 축적된 지식과 사회제도, 문화 같은 것이 우리에게 그들과 다른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이 책(<크로마뇽>)에서는 크로마뇽인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사냥을 해서 살아갔으며, 빙하기에도 살던 곳에서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순록 같은 동물을 사냥하며 살았다. 다른 종인 네안데르탈인과 같이 살아가기도 했지만, 네안데르탈인은 결국 멸종했고 크로마뇽인만 살아남았다.
이 책에서는 크로마뇽인들의 기술적, 예술적인 능력이 현대인과 다름 없었다는 증거를 많이 볼 수 있다. 나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의 과학기술, 그들이 쓰던 도구들이다. 나는 '뗀석기'라는 것이 그냥 돌을 아무렇게나 깨뜨려 모양에 맞게 이용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상당히 계획적으로 만든 도구였으며, 뗀석기의 좋은 재료가 되는 돌을 찾기 위해 매우 멀리까지 가거나, '무역'을 하기도 했다. 정교한 석기를 써서 뼈나 뿔을 쪼개고 다듬어 화살촉이나 낚싯바늘, 심지어 옷을 만드는, 귀가 있는 바늘도 만들었다. 이 책에 의하면 크로마뇽인을 번영하게 해 준 두 개의 기술 혁신은 바로 '투창기'와 '귀가 있는 바늘'이다.
투창기는 멀리서도 창을 던질 수 있게 해서 사냥 도중에 죽거나 중상을 입는 사람들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매머드같은 대형 초식동물이 멸종한 것도 투창기로 무장한 인간들의 '대량학살' 때문으로 생각된다.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나타나고 천년 남짓한 기간에 남북아메리카 전역에서 대형 동물이 모두 사라졌고, 이들이 내뱉는, 강력한 온실효과를 갖는 메탄이 감소하여 빙하기가 왔다는 말도 있다.
귀가 있는 바늘은 가죽으로 만든 옷을 몸에 맞게 만들어 여러 겹으로 겹쳐 입을 수 있게 함으로써 추운 날씨에도 활동할 수 있게 했고, 이 때문에 크로마뇽인의 거주 지역은 매우 넓어졌다.
우리 집에 <아이스 에이지>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DVD가 있는데, 거기서는 이미 멸종한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매머드, 검치호랑이, 땅나무늘보(megalonyx), 그리고 '인간'이다. DVD 해설에서는 이 인간이 네안데르탈인이라고(따라서 역시 멸종한 동물이라고) 나오지만, 이 책에서 얻은 정보에 비추어 옷이나 도구, 장신구, 그리고 벽화를 그리는 등의 생활 양식을 가지고 판단해 보건대 영화 속의 인간은 크로마뇽인에 가깝다.
크로마뇽인은 생각보다 우리와 가깝고,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실 우리의 행동양식은 협동해서 사냥을 하던 크로마뇽인에게 더 적합한 것이 많이 있다. 미술도 그들의 것에 뿌리를 둔 것은 명확하다. 남아있지 않아서 그렇지 음악도 그럴 것이다. 크로마뇽인이 사용하던 창과 투창기가 발달해 화살과 활이, 포탄과 대포가, 총알과 총이 만들어진 것이고, 현대의 바늘이나 낚싯바늘 같은 것은 재료만 바뀌었지 크로마뇽인이 사용한 것에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고고학 역시 현재의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죽은 것을 파헤쳐 기록하는 활동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크로마뇽인 시절에도 기술혁신이 있었고, 문화의 전파가 있었고, 환경파괴도 있었으며, 그들도 우리처럼 낙서도 하고 '쓸데없는' 물건을 만들기도 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이상하게 친근하게 느껴진다.
2012년 3월 3일 토요일
[책] 시간을 파는 남자 - 자유를 찾아서
제목: 시간을 파는 남자(El vendedor de tiempo)
저자: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Fernando Trias de Bes)
출판사: 21세기북스
5분에 1.99달러...
1.99달러를 주고 산 빈 통을 열면 언제건 5분의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돈을 주고 구입한 사유 재산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고용주들이 그만큼 급료를 깎을 수는 있겠지만, 5분에 해당하는 급료가 보잘것 없다보니 그것도 소용 없다.
시간을 판다고 말은 하지만 주인공인 TC('보통 남자') 가 실제로 파는 것은 '자유' 다. 5분 동안의 자유를 1.99달러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포기하고 자유를 구입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는 시간(자유)이 없기 때문에, 5분에 해당하는 급료보다 훨씬 비싼 돈을 주고 5분을 구입한다.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이 사회,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나는 이처럼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는 없지만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은 많다.
말하자면, "근무시간을 줄이고 월급을 덜 받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에게 적당한 노동의 양은 '반일 노동' 그러니까 하루 4시간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정도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말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리트윗'하고 다녔다. 지금의 반만 일하고, 월급을 반으로 줄인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그래서 알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월급을 지금의 반만 받는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지금의 상태에서 내 월급만 반으로 줄어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사회 전체가 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돈은 적고 시간이 많다면? 차 안 사고 웬만하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않을까?, 외식 덜 하고 대신 집에서 요리해 먹지 않을까? 비행기 여행 덜 다니고 기차여행을 다니지 않을까?
그러면 소비가 줄어들어 산업이 망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것도 과연 그럴까? 월급이 적은 대신 실업자가 없어지면 그들도 적당히 소비를 할 것 아닌가? 보석이나 고가 핸드백, 휴대폰, 자동차 등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은 소비가 줄겠지만 식품 같은 생활 필수품은 소비가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산업이 그쪽으로 발달할 것이다. 사실, 노동시간이 반으로 준다고 해서 월급이 반으로 줄 것 같지도 않다(필요한 노동자의 수가 많아지므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주주의 이윤이 줄어들겠지.
내가 '반일 노동' 이야기를 할 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사였다. 교사 월급이 반으로 줄면, 정말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지금처럼 차 굴리고, 외식하고, 비행기 여행 다니고, 아이들 사교육 시키고, 비싼 아파트를 먼저 사고 대출금을 갚고 하는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것들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는가? 낮은 월급과 걸핏하면 당하는 해고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내가 차 못 굴리고 아이들 사교육 못 시키는 고통을 더 크게 생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사회의 체제 그 자체일 것이다.
체제란 지배-피지배 관계를 듣기 좋게 부르는 이름일 따름이다.
고대, 중세에는 지배자들이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이라고 속여서 그 '체제'를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일자리의 개수를 줄이고 그것을 못 얻으면 큰 고통을 받게 만들어 '실업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는 것 같다. 직장이 있어도 장시간 노동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직장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유지되지 못하는 이런 사회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당연히 '지배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99%'의 피지배자를 '노예'로 만들어 최대한 이윤을 짜내려는 자들이 만든 체제인 것이다.
<시간을 파는 남자>에서 사람들은 월급을 덜 받고 자유를 얻는데 기꺼이 동참하고, 결국 '체제'는 붕괴한다. 현실에서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은 자기들의 천국인 현 체제가 흔들릴 것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불평등', '착취', '노예'
아직도 이런 말들로 사회를 묘사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려면 자유를 주어야 한다.
저자: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Fernando Trias de Bes)
출판사: 21세기북스
5분에 1.99달러...
1.99달러를 주고 산 빈 통을 열면 언제건 5분의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돈을 주고 구입한 사유 재산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고용주들이 그만큼 급료를 깎을 수는 있겠지만, 5분에 해당하는 급료가 보잘것 없다보니 그것도 소용 없다.
시간을 판다고 말은 하지만 주인공인 TC('보통 남자') 가 실제로 파는 것은 '자유' 다. 5분 동안의 자유를 1.99달러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포기하고 자유를 구입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는 시간(자유)이 없기 때문에, 5분에 해당하는 급료보다 훨씬 비싼 돈을 주고 5분을 구입한다.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이 사회,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나는 이처럼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는 없지만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은 많다.
말하자면, "근무시간을 줄이고 월급을 덜 받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에게 적당한 노동의 양은 '반일 노동' 그러니까 하루 4시간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정도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말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리트윗'하고 다녔다. 지금의 반만 일하고, 월급을 반으로 줄인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그래서 알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월급을 지금의 반만 받는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지금의 상태에서 내 월급만 반으로 줄어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사회 전체가 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돈은 적고 시간이 많다면? 차 안 사고 웬만하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않을까?, 외식 덜 하고 대신 집에서 요리해 먹지 않을까? 비행기 여행 덜 다니고 기차여행을 다니지 않을까?
그러면 소비가 줄어들어 산업이 망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것도 과연 그럴까? 월급이 적은 대신 실업자가 없어지면 그들도 적당히 소비를 할 것 아닌가? 보석이나 고가 핸드백, 휴대폰, 자동차 등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은 소비가 줄겠지만 식품 같은 생활 필수품은 소비가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산업이 그쪽으로 발달할 것이다. 사실, 노동시간이 반으로 준다고 해서 월급이 반으로 줄 것 같지도 않다(필요한 노동자의 수가 많아지므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주주의 이윤이 줄어들겠지.
내가 '반일 노동' 이야기를 할 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사였다. 교사 월급이 반으로 줄면, 정말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지금처럼 차 굴리고, 외식하고, 비행기 여행 다니고, 아이들 사교육 시키고, 비싼 아파트를 먼저 사고 대출금을 갚고 하는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것들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는가? 낮은 월급과 걸핏하면 당하는 해고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내가 차 못 굴리고 아이들 사교육 못 시키는 고통을 더 크게 생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사회의 체제 그 자체일 것이다.
체제란 지배-피지배 관계를 듣기 좋게 부르는 이름일 따름이다.
고대, 중세에는 지배자들이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이라고 속여서 그 '체제'를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일자리의 개수를 줄이고 그것을 못 얻으면 큰 고통을 받게 만들어 '실업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는 것 같다. 직장이 있어도 장시간 노동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직장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유지되지 못하는 이런 사회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당연히 '지배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99%'의 피지배자를 '노예'로 만들어 최대한 이윤을 짜내려는 자들이 만든 체제인 것이다.
<시간을 파는 남자>에서 사람들은 월급을 덜 받고 자유를 얻는데 기꺼이 동참하고, 결국 '체제'는 붕괴한다. 현실에서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은 자기들의 천국인 현 체제가 흔들릴 것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불평등', '착취', '노예'
아직도 이런 말들로 사회를 묘사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려면 자유를 주어야 한다.
2011년 10월 13일 목요일
[책] 사회적 원자 - 자연과학적 방법이 만드는 사회과학의 혁명
제목: 사회적 원자(the Social Atom)
지은이: 마크 뷰캐넌(Mark Buchanan)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과학적 방법으로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부터 있어 왔지만 지금까지 그에 터무니없이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시대가 그 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사회과학에 자연과학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천체의 운동이나 화학 반응 같은 것에 적용해서 현상을 설명하고 새로운 현상을 예측까지 해 냈던 방법들을 사회 현상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지만, 결과는 대개 실제와 동떨어지곤 한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 라는 말을 사람들이 '이론과 실제는 전혀 별개' 라는 뜻으로 쓰곤 하는 이유는, 사회 현상에는 이론이 거의 먹혀들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류 경제학 이론은 물리학(고전역학)과 비슷한 수학적인 형태로 기술되어 있어 꽤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버블경제도 금융위기도 설명하지 못한다. 자연과학에서라면 그 정도로 틀렸으면 이미 사장되었겠지만, 이상하게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할뿐만 아니라 아직도 '주류' 이다. 그 이유는, 그것을 포기하면 경제 현상을 이론으로 다룰 수 있는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뭔가를 하려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이제 꼭 그렇지만은 않게 되었다. 자연과학에서도 얼마 전까지는 계산이 너무 복잡해 할 수 없었던 일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비행기를 실제로 만들어 날려보지 않고도 설계 단계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성능이나 이상 유무를 점검할 수 있다. 원자폭탄 폭발 실험(핵실험)도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인 특성(압력이나 온도 등)에 대한 방정식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이루는 구성요소 하나하나의 특성과 그 상호작용 방식을 컴퓨터에 입력하여 컴퓨터 안에서 실험을 하는 것이다.
이 책 <사회적 원자>에는 그러한 방법을 사회적 현상에 적용하여 놀랄만한 성공을 거둔 최근의 사례들이 나와 있다. 예를 들어 부의 불평등한 정도에 대한 예측, 기업의 규모와 그 수에 대한 예측 등을 깜짝 놀랄만큼 정확하게 해 낸 것이다. 왜 깜짝 놀랄만큼이냐 하면 그 시뮬레이션의 기본이 되는 사람이나 집단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가정이 매우 거친 것이었는데도 결과가 너무나 현실과 들어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이 거칠다고 해도 핵심을 잘 짚었다면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지구와 달의 궤도를 계산할 때 수많은 세부 사항을 무시하고 지구와 달을 단지 질량을 가진 '점'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 결과는 매우 정확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가정은 많은 것을 무시했지만 핵심적인 요소를 남겨 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십여년 전부터 '카오스'니 '복잡계 이론'이니 하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지금까지의 방식(미분방정식을 세우고, 그것을 푸는 방식)으로 불가능했던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비행기의 움직임이나 원자폭탄의 폭발 뿐만 아니라, 새떼의 움직임이나 생태계의 진화, 숙주와 기생충의 군비경쟁 등을 흉내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계속 있어 왔다. 이 책은 실제 그 방향으로 탐구했던 과학자들이 이룬 것을 요약하면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지은이: 마크 뷰캐넌(Mark Buchanan)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과학적 방법으로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부터 있어 왔지만 지금까지 그에 터무니없이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시대가 그 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사회과학에 자연과학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천체의 운동이나 화학 반응 같은 것에 적용해서 현상을 설명하고 새로운 현상을 예측까지 해 냈던 방법들을 사회 현상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지만, 결과는 대개 실제와 동떨어지곤 한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 라는 말을 사람들이 '이론과 실제는 전혀 별개' 라는 뜻으로 쓰곤 하는 이유는, 사회 현상에는 이론이 거의 먹혀들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류 경제학 이론은 물리학(고전역학)과 비슷한 수학적인 형태로 기술되어 있어 꽤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버블경제도 금융위기도 설명하지 못한다. 자연과학에서라면 그 정도로 틀렸으면 이미 사장되었겠지만, 이상하게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할뿐만 아니라 아직도 '주류' 이다. 그 이유는, 그것을 포기하면 경제 현상을 이론으로 다룰 수 있는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뭔가를 하려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이제 꼭 그렇지만은 않게 되었다. 자연과학에서도 얼마 전까지는 계산이 너무 복잡해 할 수 없었던 일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비행기를 실제로 만들어 날려보지 않고도 설계 단계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성능이나 이상 유무를 점검할 수 있다. 원자폭탄 폭발 실험(핵실험)도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인 특성(압력이나 온도 등)에 대한 방정식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이루는 구성요소 하나하나의 특성과 그 상호작용 방식을 컴퓨터에 입력하여 컴퓨터 안에서 실험을 하는 것이다.
이 책 <사회적 원자>에는 그러한 방법을 사회적 현상에 적용하여 놀랄만한 성공을 거둔 최근의 사례들이 나와 있다. 예를 들어 부의 불평등한 정도에 대한 예측, 기업의 규모와 그 수에 대한 예측 등을 깜짝 놀랄만큼 정확하게 해 낸 것이다. 왜 깜짝 놀랄만큼이냐 하면 그 시뮬레이션의 기본이 되는 사람이나 집단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가정이 매우 거친 것이었는데도 결과가 너무나 현실과 들어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이 거칠다고 해도 핵심을 잘 짚었다면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지구와 달의 궤도를 계산할 때 수많은 세부 사항을 무시하고 지구와 달을 단지 질량을 가진 '점'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 결과는 매우 정확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가정은 많은 것을 무시했지만 핵심적인 요소를 남겨 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십여년 전부터 '카오스'니 '복잡계 이론'이니 하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지금까지의 방식(미분방정식을 세우고, 그것을 푸는 방식)으로 불가능했던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비행기의 움직임이나 원자폭탄의 폭발 뿐만 아니라, 새떼의 움직임이나 생태계의 진화, 숙주와 기생충의 군비경쟁 등을 흉내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계속 있어 왔다. 이 책은 실제 그 방향으로 탐구했던 과학자들이 이룬 것을 요약하면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책] 삼엽충 - 느린 과학의 세계
제목: 삼엽충(Trilobite!)
저자: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
출판사: 뿌리와이파리
화석으로만 남아있는, 절지동물(절지동물문)의 한 '강'을 이루고 있는 삼엽충의 과학적 의미를 해설하면서, 삼엽충학(넓게는 고생물학)이라는 과학 연구의 역사, 삼엽충학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 등을 곁들인 대중 과학서이다.
나는 삼엽충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또한 삼엽충이 표준화석으로서 지층이 만들어진 연대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이 책을 통해서 알았다. 다시 말해, 삼엽충에 관련한 내 지식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이 책으로 약간 넓어진 것이다.
삼엽충은 절지동물문 삼엽충강에 속한 해양동물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며, 크기는 벼룩만한 것으로부터 전갈만한 것까지 다양했다.
'포유류' 도 강(척삭동물문 포유강)을 이룬다. 포유류의 크기 역시 뒤쥐(길이 6cm)부터 고래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포유류가 살아가는 방식이 치타처럼 빠른 사냥꾼에서부터 나무늘보처럼 느린 채집자, 날아다니는 박쥐, 바다를 누비는 고래, 심지어 희한한 것들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는 인간 등으로 다양한 것처럼, 삼엽충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았다. 얕은 바다의 모래 위를 바삐 기어다니는 삼엽충, 깊은 바다의 진흙 속, 산소가 거의 없는 곳에서 화학합성 세균과 공생하던 삼엽충, 바다를 헤엄치며 플랑크톤을 먹던 삼엽충 등으로 말이다.
화석만으로 이런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수많은 '삼엽충학자'들이 화석을 발굴하고, 그림을 그리고, 논문을 쓰고, 목록을 만들고, 비교하는 등의 노력을 끈질기게, 오랜 세월에 걸쳐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었기 때문에 대륙이동에 대한 연구 같은 데에 삼엽충 화석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삼엽충에는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 삼엽충은 3억 년에 걸친 고생대 내내 지각의 운동(바다가 육지가 되고, 대륙이 움직이는 등), 기후 변화, 대멸종 같은 지구의 역사를 지켜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연결고리는 별로 알려지지 않다가 어느날 갑자기 학계의 주목을 받는 연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삼엽충의 눈에 대한 설명이다. 삼엽충의 수정체는 방해석으로 되어 있다. 방해석은 순수한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결정이다. 탄산칼슘은 석회암의 주성분으로 종유석, 석순 같은 것을 이루는 물질이다. 삼엽충의 수정체는 투명한 돌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그래서 화석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방해석은 복굴절이라는 광학적 특징을 갖는데, 복굴절은 들어오는 빛을 두 성분으로 갈라 각각 다른 방향으로 꺾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방해석을 통해 사물을 보면 보통 두 개로 보인다. 대부분의 삼엽충의 수정체는 방해석 결정에서 복굴절이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방향으로 빛이 통과되도록, 가늘고 긴 방해석 기둥 수천 개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의 삼엽충(파콥스 아과)의 수정체는 방해석을 둥글게 만들어 볼록렌즈 역할을 하게 하되, 두 종류의 광물(방해석과, 고마그네슘 방해석)을 교묘하게 배치해 초점을 제대로 맞출 수 있도록 만든, 광학적으로 경이적인 작품이다. 인간의 눈에 비해서도 결코 원시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구조이다. 파콥스는 약 4억년 전에 살았던, 크기가 3cm 정도 되는 벌레 비슷한 동물이었는데 말이다. 이것은, 나중에 등장한 생물의 몸이 꼭 더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파콥스는 일반적인 삼엽충의 방해석 눈을 출발점으로 하였고 뚜렷이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환경에서 살았기에 그런 정교한 눈을 갖도록 진화했다. 하지만 고생대 데본기 말에 멸종하여 그 정교한 눈 구조는 이어지지 않았다. 삼엽충 전체는 페름기 말에 멸종하였다(페름기 말에는 모든 생물의 90%가 멸종했다). 지금 살아남아 있는 동물들 중에는 삼엽충의 방해석 눈을 이어받은 것은 없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눈은 삼엽충과는 독립적으로 발달해 온 것이다.
삼엽충이라는 한정된 소재를 가지고 자세히(저자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엄청나게 요약한 것이겠지만) 파고들어가면서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이 책은 다른 데서 접하기 어려운 많은 흥미로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과학 서적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별로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곳곳에 유머를 섞어 놓았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고생물학자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책으로 '핀치의 부리(The Beak of the Finch, 조너던 와이너, 이끌리오)'를 읽은 적이 있다.
저자: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
출판사: 뿌리와이파리
화석으로만 남아있는, 절지동물(절지동물문)의 한 '강'을 이루고 있는 삼엽충의 과학적 의미를 해설하면서, 삼엽충학(넓게는 고생물학)이라는 과학 연구의 역사, 삼엽충학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 등을 곁들인 대중 과학서이다.
나는 삼엽충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또한 삼엽충이 표준화석으로서 지층이 만들어진 연대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이 책을 통해서 알았다. 다시 말해, 삼엽충에 관련한 내 지식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이 책으로 약간 넓어진 것이다.
삼엽충은 절지동물문 삼엽충강에 속한 해양동물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며, 크기는 벼룩만한 것으로부터 전갈만한 것까지 다양했다.
'포유류' 도 강(척삭동물문 포유강)을 이룬다. 포유류의 크기 역시 뒤쥐(길이 6cm)부터 고래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포유류가 살아가는 방식이 치타처럼 빠른 사냥꾼에서부터 나무늘보처럼 느린 채집자, 날아다니는 박쥐, 바다를 누비는 고래, 심지어 희한한 것들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는 인간 등으로 다양한 것처럼, 삼엽충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았다. 얕은 바다의 모래 위를 바삐 기어다니는 삼엽충, 깊은 바다의 진흙 속, 산소가 거의 없는 곳에서 화학합성 세균과 공생하던 삼엽충, 바다를 헤엄치며 플랑크톤을 먹던 삼엽충 등으로 말이다.
화석만으로 이런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수많은 '삼엽충학자'들이 화석을 발굴하고, 그림을 그리고, 논문을 쓰고, 목록을 만들고, 비교하는 등의 노력을 끈질기게, 오랜 세월에 걸쳐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었기 때문에 대륙이동에 대한 연구 같은 데에 삼엽충 화석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삼엽충에는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 삼엽충은 3억 년에 걸친 고생대 내내 지각의 운동(바다가 육지가 되고, 대륙이 움직이는 등), 기후 변화, 대멸종 같은 지구의 역사를 지켜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연결고리는 별로 알려지지 않다가 어느날 갑자기 학계의 주목을 받는 연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삼엽충의 눈에 대한 설명이다. 삼엽충의 수정체는 방해석으로 되어 있다. 방해석은 순수한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결정이다. 탄산칼슘은 석회암의 주성분으로 종유석, 석순 같은 것을 이루는 물질이다. 삼엽충의 수정체는 투명한 돌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그래서 화석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방해석은 복굴절이라는 광학적 특징을 갖는데, 복굴절은 들어오는 빛을 두 성분으로 갈라 각각 다른 방향으로 꺾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방해석을 통해 사물을 보면 보통 두 개로 보인다. 대부분의 삼엽충의 수정체는 방해석 결정에서 복굴절이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방향으로 빛이 통과되도록, 가늘고 긴 방해석 기둥 수천 개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의 삼엽충(파콥스 아과)의 수정체는 방해석을 둥글게 만들어 볼록렌즈 역할을 하게 하되, 두 종류의 광물(방해석과, 고마그네슘 방해석)을 교묘하게 배치해 초점을 제대로 맞출 수 있도록 만든, 광학적으로 경이적인 작품이다. 인간의 눈에 비해서도 결코 원시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구조이다. 파콥스는 약 4억년 전에 살았던, 크기가 3cm 정도 되는 벌레 비슷한 동물이었는데 말이다. 이것은, 나중에 등장한 생물의 몸이 꼭 더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파콥스는 일반적인 삼엽충의 방해석 눈을 출발점으로 하였고 뚜렷이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환경에서 살았기에 그런 정교한 눈을 갖도록 진화했다. 하지만 고생대 데본기 말에 멸종하여 그 정교한 눈 구조는 이어지지 않았다. 삼엽충 전체는 페름기 말에 멸종하였다(페름기 말에는 모든 생물의 90%가 멸종했다). 지금 살아남아 있는 동물들 중에는 삼엽충의 방해석 눈을 이어받은 것은 없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눈은 삼엽충과는 독립적으로 발달해 온 것이다.
삼엽충이라는 한정된 소재를 가지고 자세히(저자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엄청나게 요약한 것이겠지만) 파고들어가면서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이 책은 다른 데서 접하기 어려운 많은 흥미로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과학 서적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별로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곳곳에 유머를 섞어 놓았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고생물학자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책으로 '핀치의 부리(The Beak of the Finch, 조너던 와이너, 이끌리오)'를 읽은 적이 있다.
[책] 거대한 전환 - 시장주의 극복, 그리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하여
제목: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 The Political and Economical Origins of Our Time)
저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
출판사: 도서출판 길
약 100년 전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인데, 읽어보면 그것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매우 유효함을 알 수 있다.
노동, 토지, 화폐까지도 상품으로 간주하는 완벽한 자기조정시장이라는 허황된 꿈.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사회' 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가져온 전세계적인 재앙.
자기조정시장이라는 이론은 수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시장의 자기조정 과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것이고, 사람들은 저항하게 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혼란이 일어나고, 그 틈에 사람들의 분노를 악용, 정치적 세력을 얻는 자들이 생긴다. 파시즘이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민족이나 외국에 국민의 분노를 집중시켜 정치적 이득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국민은 장기판의 졸일 뿐이다. 여차하면 전쟁을 일으킨다.
이래서 생긴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지금의 상황도 오싹할 정도로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국제적 자유무역, 금융규제 완화, 국제적 투기자본의 자유로운 기업사냥... (신자유주의 경제)
그러다가 맞은 금융위기, 삶의 피폐. (2008년 금융위기)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폭력도 마다 않는 극우 세력의 등장. (노르웨이 테러)
이제 곳곳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등장하고, 또 한번 재앙이 올 것인가?
아니면 1930년대의 교훈이 역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에서 칼 폴라니는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런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이 왜 헛된 꿈(유토피아)인지 철저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제안하고 있다.
<거대한 전환>은 길고 난해하지만 그만큼 읽는 보람이 있다. 박식한 저자의 힘있는 말들, 그리고 그것을 적절한 우리말로 옮김은 물론 꼼꼼하게 설명을 덧붙여 준 번역자 덕분에 읽고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역사의 가치는 현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경제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저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
출판사: 도서출판 길
약 100년 전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인데, 읽어보면 그것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매우 유효함을 알 수 있다.
노동, 토지, 화폐까지도 상품으로 간주하는 완벽한 자기조정시장이라는 허황된 꿈.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사회' 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가져온 전세계적인 재앙.
자기조정시장이라는 이론은 수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시장의 자기조정 과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것이고, 사람들은 저항하게 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혼란이 일어나고, 그 틈에 사람들의 분노를 악용, 정치적 세력을 얻는 자들이 생긴다. 파시즘이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민족이나 외국에 국민의 분노를 집중시켜 정치적 이득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국민은 장기판의 졸일 뿐이다. 여차하면 전쟁을 일으킨다.
이래서 생긴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지금의 상황도 오싹할 정도로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국제적 자유무역, 금융규제 완화, 국제적 투기자본의 자유로운 기업사냥... (신자유주의 경제)
그러다가 맞은 금융위기, 삶의 피폐. (2008년 금융위기)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폭력도 마다 않는 극우 세력의 등장. (노르웨이 테러)
이제 곳곳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등장하고, 또 한번 재앙이 올 것인가?
아니면 1930년대의 교훈이 역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에서 칼 폴라니는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런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이 왜 헛된 꿈(유토피아)인지 철저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제안하고 있다.
<거대한 전환>은 길고 난해하지만 그만큼 읽는 보람이 있다. 박식한 저자의 힘있는 말들, 그리고 그것을 적절한 우리말로 옮김은 물론 꼼꼼하게 설명을 덧붙여 준 번역자 덕분에 읽고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역사의 가치는 현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경제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교육] 독서교육 - 왜, 그리고 어떻게?
독서는 그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이며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책을 읽음으로써 수학 교과서의 내용을 학습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독서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독서를 통해 얻는 것은 화려한 꽃이나 맛 좋은 열매가 아니라, 튼튼한 뿌리에 해당하지 않을까?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보다도,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상상력, 문제 해결 능력 등, 정신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이 독서의 역할이다. 독서를 통해 수학을 더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기초체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특정한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서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훨씬 중요한, 독서의 원래 기능을 잊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독서는 개인적인 활동이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집단적으로 특정한 책의 내용을 공부하는 경우 그 책은 교과서라 불려야 하고, 그 활동은 독서가 아니라 수업이나 세미나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독서교육’이란 말은 스스로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독서교육은 매우 모호한 활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육이라고 하면 학생들에게 직접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깨닫게 하는 활동이라는 고정관념으로는 독서교육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독서교육은 눈에 보이는 곳, 손이 닿는 곳에 좋은 책이 항상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책이 가까이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학교의 경우 학생이 가장 많이 다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도서관이 있어야 하며, 분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학생들이 자유롭게 책을 열람하고 대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실에도 좋은 책들을 비치하고 계속 ‘업데이트’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투자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는, 좋은 책을 소개하고 빌려주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이런 것도 분명히 ‘교육’의 한 방법이고 그래서 도서관이 교육기관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교육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첫째 오류는, 독서를 특정한 분야의 공부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독서는 정신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이다. 특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그 과목 공부라고 불러야지, 독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독서의 본질을 특정 지식의 획득인 것으로 호도하기 때문이다. 수학에 독서를 접목시키려는 노력은 바람직하지만, 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수학 분야의 좋은 책을 읽음으로써 전체적인 수학적 소양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 두어야 한다. 독서가 수학 공부의 수단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서는 수학 같은 특정 과목 공부보다 더 중요하거나, 적어도 다른 것의 수단이 되어도 좋을 정도로 덜 중요하지는 않다.
두 번째 오류는, 독서의 양과 질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책을 소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서 독서의 양을 늘리고 질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까지는 좋으나, 직접적으로 학생들의 독서에 간섭하는 방식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읽으라고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요한다든지, 이 책꽂이에 있는 책을 다 읽으라고 한다든지, 일주일에 몇 권 이상 꼭 읽으라고 한다든지, 읽은 책에 대해서 꼭 독후감 등을 쓰라고 한다든지 하는 일이 그렇다. 이런 식의 간섭이나 강요는 지적인 폭력일 뿐만 아니라, 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지속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들게 한다는, 독서교육의 목적과 정면충돌한다(일반적으로, 강요는 나쁘다).
세 번째 오류는 독서의 성과를 단시간 안에 양적으로 측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독서의 성과는 특정 과목 공부의 성과보다도 더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그 성과라는 것도 내면의 변화 같은 애매한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에 ‘점수’를 매기고, 결과적으로 ‘등수’까지 매기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 독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독서를 제대로 해 본 적조차 없는 자들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독자들도 자기가 책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리라고 생각한다.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수많은 책들, 다 읽기도 하고, 읽다 말기도 하고, 건너뛰면서 군데군데 읽기도 하고, 가끔 틈틈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림만 보고 말기도 한 그 책들을 통해 얻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지식, 깨달음, 감동, 사고방식의 전환 ... 이런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얽히고설켜 지금의 나를 만든 것 아닌가? 그런 독서의 효과를, 읽은 권수나 그 책을 읽고 나서 쓴 독후감 같은 것으로 측정해서 점수로 환산하려고 하다니... 마치 인간 자체를 점수로 환산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은 독서교육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독서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데, 물론 학교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상황 항목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체는 바람직할 수 있다. 학생의 독서활동을 파악하면 학생의 관심 분야를 알 수 있기 때문에 학생과 대화의 물꼬를 틀수도 있고, 바람직한 독서에 대한 조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상급학교 입시에 평가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도 입시에 반영되면 곧바로 입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입시에 반영되지 않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독서활동이 상급 학교 입시에서 ‘평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독서 자체가 아닌 독서활동상황란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될 것이고, 봉사활동이 그랬던 것처럼 교사와 학생에게서 막대한 시간을 빼앗는 한편 이름에 정확히 반대되는 효과를 갖는 반교육적 장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인가,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인가? 많은 사람이 당연히 살기 위해 먹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고, 먹는 것은 그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실제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먹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사람도 말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받는 것인가? 어떤 이는 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장사가 되었건 교육이 되었건 그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그 일을 계속하면서 생활하기 위해서 돈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말에는 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직업으로서 하는 일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어느 것이 목적이고 어느 것이 그것을 위한 수단인가,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이 어느 것이고 덜 중요한 것이 어느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가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관은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일에 임하는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인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가? 공부와 대학(학벌)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에 따라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수준별 이동수업, 전국일제고사, 교육과정 개정 등 현안에 대한 입장을 가르는 것도 결국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 곧 가치관이다.
독서교육을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역시 가치관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교육은 문학, 역사, 수학, 과학과 같은 학문의 가치를 오직 (될 수 있으면 알아주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린 전과가 있다. (물론 그것은 농업, 공업, 서비스업을 막론하고 모든 직업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이 사회의 경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과목 공부뿐만 아니라 자치활동, 클럽활동, 봉사활동 같은 것마저도 입시의 수단으로 만들어서 본질과 무관하게 변질시키고 있는데, 어찌 생각하면 그 재주가 신기하기도 하다. 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이라는 항목이 들어가게 된 지금, 독서가 입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닐까 하는, 매우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런 사태를 막고 정상적인 독서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독서가 무엇인지, 왜 그것이 필요하고 학교에서 독서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한 책을 읽음으로써 수학 교과서의 내용을 학습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독서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독서를 통해 얻는 것은 화려한 꽃이나 맛 좋은 열매가 아니라, 튼튼한 뿌리에 해당하지 않을까?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보다도,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상상력, 문제 해결 능력 등, 정신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이 독서의 역할이다. 독서를 통해 수학을 더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기초체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특정한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서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훨씬 중요한, 독서의 원래 기능을 잊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독서는 개인적인 활동이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집단적으로 특정한 책의 내용을 공부하는 경우 그 책은 교과서라 불려야 하고, 그 활동은 독서가 아니라 수업이나 세미나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독서교육’이란 말은 스스로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독서교육은 무엇인가? 즉, 독서교육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활동인가? 독서교육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지속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들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독서교육의 내용이란 독서할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는 일, 그리고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일 정도일 것이다. 그것을 넘는 욕심은 문제를 일으킨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독서교육 관련 소책자에서 본 것인데, 이런 권리들을 학생이나 자녀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저 권리들을 침해하지 않으려면, 독서교육은 좋은 책에 대한 소개, 독서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 독서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등에 그쳐야 한다. 특정한 책이나 특정한 분야의 책을 ‘읽도록 만들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독서교육 관련 소책자에서 본 것인데, 이런 권리들을 학생이나 자녀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저 권리들을 침해하지 않으려면, 독서교육은 좋은 책에 대한 소개, 독서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 독서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등에 그쳐야 한다. 특정한 책이나 특정한 분야의 책을 ‘읽도록 만들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열 가지 권리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군데군데 골라서 읽을 권리
소리 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보바리즘(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공상)을 누릴 권리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중 -
따라서 독서교육은 매우 모호한 활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육이라고 하면 학생들에게 직접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깨닫게 하는 활동이라는 고정관념으로는 독서교육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독서교육은 눈에 보이는 곳, 손이 닿는 곳에 좋은 책이 항상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책이 가까이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학교의 경우 학생이 가장 많이 다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도서관이 있어야 하며, 분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학생들이 자유롭게 책을 열람하고 대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실에도 좋은 책들을 비치하고 계속 ‘업데이트’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투자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는, 좋은 책을 소개하고 빌려주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이런 것도 분명히 ‘교육’의 한 방법이고 그래서 도서관이 교육기관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교육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첫째 오류는, 독서를 특정한 분야의 공부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독서는 정신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이다. 특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그 과목 공부라고 불러야지, 독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독서의 본질을 특정 지식의 획득인 것으로 호도하기 때문이다. 수학에 독서를 접목시키려는 노력은 바람직하지만, 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수학 분야의 좋은 책을 읽음으로써 전체적인 수학적 소양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 두어야 한다. 독서가 수학 공부의 수단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서는 수학 같은 특정 과목 공부보다 더 중요하거나, 적어도 다른 것의 수단이 되어도 좋을 정도로 덜 중요하지는 않다.
두 번째 오류는, 독서의 양과 질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책을 소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서 독서의 양을 늘리고 질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까지는 좋으나, 직접적으로 학생들의 독서에 간섭하는 방식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읽으라고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요한다든지, 이 책꽂이에 있는 책을 다 읽으라고 한다든지, 일주일에 몇 권 이상 꼭 읽으라고 한다든지, 읽은 책에 대해서 꼭 독후감 등을 쓰라고 한다든지 하는 일이 그렇다. 이런 식의 간섭이나 강요는 지적인 폭력일 뿐만 아니라, 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지속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들게 한다는, 독서교육의 목적과 정면충돌한다(일반적으로, 강요는 나쁘다).
세 번째 오류는 독서의 성과를 단시간 안에 양적으로 측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독서의 성과는 특정 과목 공부의 성과보다도 더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그 성과라는 것도 내면의 변화 같은 애매한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에 ‘점수’를 매기고, 결과적으로 ‘등수’까지 매기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 독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독서를 제대로 해 본 적조차 없는 자들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독자들도 자기가 책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리라고 생각한다.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수많은 책들, 다 읽기도 하고, 읽다 말기도 하고, 건너뛰면서 군데군데 읽기도 하고, 가끔 틈틈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림만 보고 말기도 한 그 책들을 통해 얻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지식, 깨달음, 감동, 사고방식의 전환 ... 이런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얽히고설켜 지금의 나를 만든 것 아닌가? 그런 독서의 효과를, 읽은 권수나 그 책을 읽고 나서 쓴 독후감 같은 것으로 측정해서 점수로 환산하려고 하다니... 마치 인간 자체를 점수로 환산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은 독서교육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독서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데, 물론 학교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상황 항목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체는 바람직할 수 있다. 학생의 독서활동을 파악하면 학생의 관심 분야를 알 수 있기 때문에 학생과 대화의 물꼬를 틀수도 있고, 바람직한 독서에 대한 조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상급학교 입시에 평가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도 입시에 반영되면 곧바로 입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입시에 반영되지 않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독서활동이 상급 학교 입시에서 ‘평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독서 자체가 아닌 독서활동상황란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될 것이고, 봉사활동이 그랬던 것처럼 교사와 학생에게서 막대한 시간을 빼앗는 한편 이름에 정확히 반대되는 효과를 갖는 반교육적 장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인가,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인가? 많은 사람이 당연히 살기 위해 먹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고, 먹는 것은 그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실제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먹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사람도 말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받는 것인가? 어떤 이는 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장사가 되었건 교육이 되었건 그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그 일을 계속하면서 생활하기 위해서 돈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말에는 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직업으로서 하는 일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어느 것이 목적이고 어느 것이 그것을 위한 수단인가,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이 어느 것이고 덜 중요한 것이 어느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가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관은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일에 임하는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인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가? 공부와 대학(학벌)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에 따라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수준별 이동수업, 전국일제고사, 교육과정 개정 등 현안에 대한 입장을 가르는 것도 결국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 곧 가치관이다.
독서교육을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역시 가치관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교육은 문학, 역사, 수학, 과학과 같은 학문의 가치를 오직 (될 수 있으면 알아주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린 전과가 있다. (물론 그것은 농업, 공업, 서비스업을 막론하고 모든 직업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이 사회의 경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과목 공부뿐만 아니라 자치활동, 클럽활동, 봉사활동 같은 것마저도 입시의 수단으로 만들어서 본질과 무관하게 변질시키고 있는데, 어찌 생각하면 그 재주가 신기하기도 하다. 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이라는 항목이 들어가게 된 지금, 독서가 입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닐까 하는, 매우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런 사태를 막고 정상적인 독서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독서가 무엇인지, 왜 그것이 필요하고 학교에서 독서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책] 생명의 도약 - 생명이라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다
제목: 생명의 도약(Life Ascending: The Ten Great Inventions of Evolution)
지은이: 닉 레인(Nick Lane), 김정은 역
출판사: 글항아리
사실 생명이라는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원리를 제대로 밝혀낸 것은 다윈이다. 그 원리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이다.
원리는 논리적으로 명확하고 증거도 수없이 많지만, 구체적인 생명 현상, 예를 들어 광합성이 어떻게 해서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느냐를 설명하는 것은 후대의 과학자들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그 숙제를 해 온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밝혀낸 것들의 핵심을 설명하는 보고서가 여기 있다.
<생명의 도약>의 내용은 부제 그대로 '진화의 10대 발명'이다. 중요한 10가지 생명 현상이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과정을 진화라는 사고방식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그동안 과학자들이 알아낸 수많은 화학적, 생리학적, 생태학적 지식들이 동원된다. 이 책의 풍부한 과학적, 철학적 내용은 실제 읽어야만 알 수 있겠지만 내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10가지 각각에 대해 최대한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생명 그 자체 - 심해의 알칼리성 열수 분출공의 특이한 화학적 환경에서 아미노산, RNA 같은 유기 분자와 크레브스회로같은 중요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2. DNA - 최초에는 RNA가 유기화학반응의 촉매로 도입되었고 그 후에 복제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지금도 일부 바이러스는 RNA로 복제함), 나중에 DNA가 '안정된 설계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광합성 - 세균은 돌연변이와 유전자 수평이동을 통해 빠른 속도로 진화할 수 있다. 광자의 에너지를 이용, 물을 산화시켜 ATP(생화학적 에너지)를 만드는 장치와, 역시 광자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이산화탄소를 환원시켜 유기물을 만드는 장치가 먼저 나타났고, 그 두 가지 장치를 모두 갖춘 남조세균(cyanobacteria)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지금과 같은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남조세균은 나중에 다른 세포(진핵세포) 안으로 들어가 엽록체가 되었고, 그로 인해 녹색식물 등의 광합성 생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은이: 닉 레인(Nick Lane), 김정은 역
출판사: 글항아리
사실 생명이라는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원리를 제대로 밝혀낸 것은 다윈이다. 그 원리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이다.
원리는 논리적으로 명확하고 증거도 수없이 많지만, 구체적인 생명 현상, 예를 들어 광합성이 어떻게 해서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느냐를 설명하는 것은 후대의 과학자들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그 숙제를 해 온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밝혀낸 것들의 핵심을 설명하는 보고서가 여기 있다.
<생명의 도약>의 내용은 부제 그대로 '진화의 10대 발명'이다. 중요한 10가지 생명 현상이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과정을 진화라는 사고방식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그동안 과학자들이 알아낸 수많은 화학적, 생리학적, 생태학적 지식들이 동원된다. 이 책의 풍부한 과학적, 철학적 내용은 실제 읽어야만 알 수 있겠지만 내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10가지 각각에 대해 최대한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생명 그 자체 - 심해의 알칼리성 열수 분출공의 특이한 화학적 환경에서 아미노산, RNA 같은 유기 분자와 크레브스회로같은 중요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2. DNA - 최초에는 RNA가 유기화학반응의 촉매로 도입되었고 그 후에 복제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지금도 일부 바이러스는 RNA로 복제함), 나중에 DNA가 '안정된 설계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광합성 - 세균은 돌연변이와 유전자 수평이동을 통해 빠른 속도로 진화할 수 있다. 광자의 에너지를 이용, 물을 산화시켜 ATP(생화학적 에너지)를 만드는 장치와, 역시 광자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이산화탄소를 환원시켜 유기물을 만드는 장치가 먼저 나타났고, 그 두 가지 장치를 모두 갖춘 남조세균(cyanobacteria)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지금과 같은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남조세균은 나중에 다른 세포(진핵세포) 안으로 들어가 엽록체가 되었고, 그로 인해 녹색식물 등의 광합성 생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4. 진핵세포 - 산소호흡을 할 수 있는 세균과, 그 세균의 부산물을 이용하여 살아가는 고세균(세균과 비슷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종류인 미생물)이 공생하다가 세균이 고세균 안으로 들어가면서 유전체가 섞여서 만들어졌다. 산소호흡을 하던 세균은 세포내 소기관이 되었고 그것이 바로 '미토콘드리아'다. 이제 에너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세포는 쓸데없는 DNA가 많아지는 현상이 생겼고, 그런 현상을 통제하기 위해 핵이 생겼다. 또한 동물, 식물을 비롯한 다양한 생물들이 나타나게 된 것도 진핵세포(즉, 미토콘드리아가 있는 세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5. 성 - 진핵세포가 형성되고 두 미생물의 유전체가 섞이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빈번하고 빠른 변이가 일어났고 세포융합과 감수분열(둘 다 세균과 고세균의 생화학적인 절차로 간단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통해 해로운 유전자 조합을 제거하지 않은 종류의 세포들은 멸종했다. 현재 무성생식을 하고 있는 진핵생물들은 진화 과정에서 유성생식 기능이 없어진 것이다.
6. 운동 - 세균에서 유래한, 세포의 뼈대를 이루는 액틴과 튜블린에 미오신이 붙어 움직이면서 진핵세포 내에서 분자나 소기관을 이리저리 움직여 주는 '물류' 시스템이 생겼다. 그 액틴과 미오신이 나중에 근육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7. 시각 - 빛을 감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세균이나 고세균 수준에서 이미 빛을 이용하는 장치들은 있었고, 캄브리아기에 산소 농도가 높아지면서 몸집이 큰 동물들이 나오게 되어 시각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신경 시스템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한 망막에서 시작해 수정체 등을 갖춘 눈이 되는 것은 진화에서는 쉬운 일이며, 그래서 여러 번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8. 온혈성 - 약 2억 5천만년 전, 페름기의 화산활동으로 시작된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숨을 헐떡이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파충류들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풀 같은 식물밖에 없었는데 식물은 질소 함량이 낮다. 필요한 질소를 섭취하기 위해 식물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탄소 같은 다른 성분은 남아돈다. 이 남아도는 영양소를 그냥 저장하는 방향으로 간 동물은 거대한 공룡이 되었고, 태우는 방향으로 간 동물은 남아도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재빠른 몸놀림과 밤에도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온혈동물이 되었다.
9. 의식 - 감각을 통합하여 관장하는 의식은 함께 흥분해야 할 뉴런들 사이의 연결(시냅스)은 살리고 불필요한 연결을 없애는 방식으로 형성된다. 이런 일은 주로 유아기에 이루어지는데, 수많은 뉴런 연결부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다. 의식의 존재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함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그 구체적인 진화 과정은 아직 모른다.
10. 죽음 - 미토콘드리아 내부에 있는 DNA는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미토콘드리아 내막의 고전압 때문에 쉽게 손상된다. 손상에 대비해서 복사본이 5개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손상은 축적되고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너무 많이 손상되면 미토콘드리아는 분해되고, 그런 식으로 계속되면 세포가, 그리고 개체 전체가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죽음이다. 따라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세포(생식세포)는 최대한 미토콘드리아 손상이 적도록 되도록 빨리 만들어져야 하며, 태아가 발생하자마자 곧 생식세포를 만드는 것은 그런 이유다(그러고도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떨어지는 생식세포는 또다시 솎아내어진다). 체세포를 복제하여 만든 다세포 생물(예를 들어 복제양 돌리)의 수명이 짧은 것도, 복제의 원형인 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는 이미 상당 기간 DNA 손상을 입은 상태이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5. 성 - 진핵세포가 형성되고 두 미생물의 유전체가 섞이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빈번하고 빠른 변이가 일어났고 세포융합과 감수분열(둘 다 세균과 고세균의 생화학적인 절차로 간단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통해 해로운 유전자 조합을 제거하지 않은 종류의 세포들은 멸종했다. 현재 무성생식을 하고 있는 진핵생물들은 진화 과정에서 유성생식 기능이 없어진 것이다.
6. 운동 - 세균에서 유래한, 세포의 뼈대를 이루는 액틴과 튜블린에 미오신이 붙어 움직이면서 진핵세포 내에서 분자나 소기관을 이리저리 움직여 주는 '물류' 시스템이 생겼다. 그 액틴과 미오신이 나중에 근육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7. 시각 - 빛을 감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세균이나 고세균 수준에서 이미 빛을 이용하는 장치들은 있었고, 캄브리아기에 산소 농도가 높아지면서 몸집이 큰 동물들이 나오게 되어 시각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신경 시스템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한 망막에서 시작해 수정체 등을 갖춘 눈이 되는 것은 진화에서는 쉬운 일이며, 그래서 여러 번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8. 온혈성 - 약 2억 5천만년 전, 페름기의 화산활동으로 시작된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숨을 헐떡이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파충류들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풀 같은 식물밖에 없었는데 식물은 질소 함량이 낮다. 필요한 질소를 섭취하기 위해 식물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탄소 같은 다른 성분은 남아돈다. 이 남아도는 영양소를 그냥 저장하는 방향으로 간 동물은 거대한 공룡이 되었고, 태우는 방향으로 간 동물은 남아도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재빠른 몸놀림과 밤에도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온혈동물이 되었다.
9. 의식 - 감각을 통합하여 관장하는 의식은 함께 흥분해야 할 뉴런들 사이의 연결(시냅스)은 살리고 불필요한 연결을 없애는 방식으로 형성된다. 이런 일은 주로 유아기에 이루어지는데, 수많은 뉴런 연결부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다. 의식의 존재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함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그 구체적인 진화 과정은 아직 모른다.
10. 죽음 - 미토콘드리아 내부에 있는 DNA는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미토콘드리아 내막의 고전압 때문에 쉽게 손상된다. 손상에 대비해서 복사본이 5개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손상은 축적되고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너무 많이 손상되면 미토콘드리아는 분해되고, 그런 식으로 계속되면 세포가, 그리고 개체 전체가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죽음이다. 따라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세포(생식세포)는 최대한 미토콘드리아 손상이 적도록 되도록 빨리 만들어져야 하며, 태아가 발생하자마자 곧 생식세포를 만드는 것은 그런 이유다(그러고도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떨어지는 생식세포는 또다시 솎아내어진다). 체세포를 복제하여 만든 다세포 생물(예를 들어 복제양 돌리)의 수명이 짧은 것도, 복제의 원형인 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는 이미 상당 기간 DNA 손상을 입은 상태이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책] 화씨 451 - 책을 태울 때
제목: 화씨 451(Fahrenheit 451)
저자: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박상준 역
출판사: 황금가지
어렸을 때부터 과학서적만 편식한 인간의 한계인가? 이런 책을 이제서야 접하게 된 것이 아쉬우면서,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좀 특이하다. 아이들에게 보여 줄 DVD를 검색하다가 일본에서 나온 애니메이션 중에 <도서관 전쟁> 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도서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클릭하게 되었다(제목이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했고). 그래서 그 애니메이션을 결국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좀 비현실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검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법이 통과되고, 강제적인 방법으로라도 검열을 집행할 권한을 가진 기관이 있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예외적으로 도서관 내부에서는 검열을 못하게 되어 있지만 정부 검열기관 및 그에 동조하는 과격한 민간단체가 불접적인 방법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탈취해 가거나 심지어 도서관 자체에 대한 테러를 반복적으로 자행하자(이는 물론 불편한 진실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권력자들이 사주한 것일 것이다.) 이번에는 도서관을 경비하려는 무장 조직(도서대)이 생기고, 그리하여 검열을 원하는 쪽과 그것을 막으려는 쪽이 서로 총질을 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이야기는 한 소녀가 그 도서대에 들어가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희극적 요소를 섞어 가며 그리고 있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심각한 주제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10편짜리 애니메이션인 <도서관 전쟁> 중 한 편에서 어떤 책을 '예언서' 라 부르면서, 그 책을 검열기관에서 혈안이 되어 찾아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극중에서 그 '예언서'의 제목은 언급되지 않지만, 그 책은 미국 작가의 SF로서, 미래 사회에서 책을 불태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실제로 있는 소설이라고 짐작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예언서' 가 <화씨 451>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고, 곧 주문하여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화씨 451>의 설정이 현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1951년에 나온 책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책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TV와, 귓속형 라디오(실제의 mp3에 해당)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대화는 무엇을 샀네, 드라마 내용이 어떻네 하는 내용에만 거의 한정되고, 투표를 하지만 그 기준은 외모 같은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고, TV를 국가기관이 통제하여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가는 그런 일들이 '예언'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집집마다 방화 처리를 하면서 불을 끄기 위한 소방서(firehouse)와 소방수(fireman)는 필요 없어지고 그 이름들은 책을 태우기 위한 기관과 직업을 가리키게 된다. 번역서에는 '소방서'와 '방화서', '소방수'와 '방화수'라는 말이 구별되어 쓰였는데 원어로는 firehouse와 fireman 이 중의적인 뜻을 담았던 것 같다. 제목으로 쓰인 '화씨 451' 은 종이의 발화점(불꽃이 없어도 스스로 점화되는 온도)을 말하는데 섭씨로는 약 233도에 해당한다.
<책 파괴의 세계사>라는 책에서 '책을 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도 태운다' 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불온서적'을 남김없이 찾아서 불태우겠다는 발상을 할 정도로 미쳐버린 권력이라면, 불편한 말을 지껄이는 사람의 입을 영원히 막는 것 정도는 우스울지 모른다. 처음에는 아마도 청소년에 유해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책을 태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위험한 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그 다음에는 국가 정책에 반한다는 이유로, 그 다음에는... 아마도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이유만으로도 책을 태우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라는 걸 하다니, 권력을 쥔 정치가나 재벌에게는 그 얼마나 불편한 일이겠는가? <화씨 451>에서도 그와 비슷한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처음에 책을 태우기 시작한 것은 국가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이슬람교를 희화화했다며 소설을 태워버리고 작가를 죽이려고 했던 일이 있었듯이, 이 책은 이런 사람들이 태우고, 저 책은 또 다른 사람들이 태우고, 그러다가 급기야 국가권력이 개입해 포르노 잡지 등 일부 '위험하지 않은' 책만 빼고 모두 태우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위키피디아에 들어가 보니 책을 태웠던 주요한 사건의 목록이라며 진시황의 분서갱유부터 나치가 저지른 분서를 거쳐 2010년 미국방부에서 기밀이 포함됐다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을 파헤친 <Operation Dark Heart> 9,500권을 구입해서 태웠다는 증언까지 103개의 사건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도서관 전쟁> 이나 <화씨 451>에 묘사된 사회는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날로 생각이 없어져 가고 있는 지금, 그 생각없음을 먹고 사는 권력자들은 더욱 더 생각없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교사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교사들이야말로 최전선에서 그런 권력자들과 싸워야하는 '도서대'가 아닐까?
2011년 10월 11일 화요일
[책] 도가니, 초콜릿 전쟁, 이끼 - 악은 강하다
우리 집에 공지영 팬이 있어서 얼마 전에 <도가니>를 읽게 되었는데 어지간히 답답한 이야기인 것 같다(답답한 걸로 치면 내가 읽은 책 중에는 '남한산성'이 최고인 듯하지만).
우리는 왜 이런 답답한 이야기들을 읽는 것일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혹은 '그리하여 정의는 또다시 승리했다' 로 끝나는,
잠시의 통쾌함을 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점점 흐리게 하는 이야기들보다도 이런 답답한 이야기에 공감이 가는 것은 아마도 그 편이 진실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도가니>를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의 다른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제목: 도가니
저자: 공지영
출판사: 창비
제목: 초콜릿 전쟁(The Chocolate War)
저자: 로버트 코마이어
출판사: 비룡소
제목: 이끼(웹툰 / 만화 5권)
저자: 윤태호
출판사: 미디어 다음 / 한국데이터하우스
내용은 각각 다르지만 세 이야기가 모두 작고 폐쇄적인 사회를 통해 '기득권'의 지배를 계속되게 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악한 자들이 어떻게 힘을 갖게 되고, 악하면서 강한 그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돕고 있으며, 어떻게 약자들을 침묵시키며, 도전하는 자들을 어떻게 탄압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함' 이란 내 나름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짓밟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다.
<도가니>에서는 농아인 학생들을 성폭행하는 교장과 그를 감싸는 무진시의 권력층
<초콜릿 전쟁>에서는 '과제'를 통해 학생들을 은근히 협박하고 통제하는 아치와 그의 조직 자경대
<이끼>에서는 폐쇄적인 마을을 이루며 이익을 위해 주변 지역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이장'과 그의 하수인들
이들이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하면서 강한 자들이다.
현실은 이런 악하면서 강한 지배자들이 약자들의 것을 빼앗고 그들의 삶을 짓밟으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약자들이 힘을 모아서 저항하는 것뿐인데, 지배자들은 교묘하거나(여론 조작) 무자비한(폭력) 방법으로 그것을 막고 있다.
민주주의는 이런 강자들(다시 말해,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특권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인데, 이런 악한 지배자들이 볼 때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말은 그렇게 안 할지 몰라도.
<이끼>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온갖 악행과 만행을 저지른 '이장'을 잡으러 검사가 들이닥쳤지만 이미 이장은 그 검사의 '대가리의 대가리의 대가리'에게 줄을 대 놓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우리는 왜 이런 답답한 이야기들을 읽는 것일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혹은 '그리하여 정의는 또다시 승리했다' 로 끝나는,
잠시의 통쾌함을 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점점 흐리게 하는 이야기들보다도 이런 답답한 이야기에 공감이 가는 것은 아마도 그 편이 진실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도가니>를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의 다른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제목: 도가니
저자: 공지영
출판사: 창비
제목: 초콜릿 전쟁(The Chocolate War)
저자: 로버트 코마이어
출판사: 비룡소
제목: 이끼(웹툰 / 만화 5권)
저자: 윤태호
출판사: 미디어 다음 / 한국데이터하우스
내용은 각각 다르지만 세 이야기가 모두 작고 폐쇄적인 사회를 통해 '기득권'의 지배를 계속되게 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악한 자들이 어떻게 힘을 갖게 되고, 악하면서 강한 그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돕고 있으며, 어떻게 약자들을 침묵시키며, 도전하는 자들을 어떻게 탄압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함' 이란 내 나름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짓밟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다.
<도가니>에서는 농아인 학생들을 성폭행하는 교장과 그를 감싸는 무진시의 권력층
<초콜릿 전쟁>에서는 '과제'를 통해 학생들을 은근히 협박하고 통제하는 아치와 그의 조직 자경대
<이끼>에서는 폐쇄적인 마을을 이루며 이익을 위해 주변 지역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이장'과 그의 하수인들
이들이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하면서 강한 자들이다.
현실은 이런 악하면서 강한 지배자들이 약자들의 것을 빼앗고 그들의 삶을 짓밟으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약자들이 힘을 모아서 저항하는 것뿐인데, 지배자들은 교묘하거나(여론 조작) 무자비한(폭력) 방법으로 그것을 막고 있다.
민주주의는 이런 강자들(다시 말해,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특권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인데, 이런 악한 지배자들이 볼 때는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말은 그렇게 안 할지 몰라도.
<이끼>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온갖 악행과 만행을 저지른 '이장'을 잡으러 검사가 들이닥쳤지만 이미 이장은 그 검사의 '대가리의 대가리의 대가리'에게 줄을 대 놓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내 건들라모... 대한민국을 대청소해야 할끼야나에게는 사뭇 감명깊은(?) 대사였다.
[책] 정자전쟁 - 인간 행동에 대한 과학적 탐구
제목: 정자 전쟁(Sperm Wars)
저자: 로빈 베이커
출판사: 이학사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나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곤란한 현상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성교가 번식을 위한 활동이라면, 임신 가능성에 관계 없이 수시로 성교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라서? 하지만 다른 동물들 중에도 이런 경우는 많다.
이 책은 인간의 성에 관련된 행동 방식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간다. 거기에는 유전자 수준, 세포(정자, 난자) 수준, 사회적 수준의 원인들이 얽혀 있고, 이 모든 현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진화' 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 책은 37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먼저 성적인 행동의 전형적인 예를 말해 주는 가상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이야기의 상황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나온다. 그 가상의 이야기는 거의 "야설" 처럼 보이지만 과장이나 왜곡 없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과학적인 설명 부분은 각 <장면>에 대해 일관성 있는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 이론의 핵심에 '정자전쟁' 이라는 개념이 있다. 정자전쟁은 한 여자의 몸 안에 짧은 간격을 두고 여러 남자의 정자가 들어왔을 때, 서로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긴 편의 정자가 난자를 수태시킨다(가임기인 경우). 인구의 4%가 정자전쟁을 거쳐서 수태되어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별것 아닌 수치처럼 보이지만, 정자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남자의 행동방식, 그리고 좀 더 경쟁력 있는 자식을 만들기 위해 정자전쟁을 적절히 이용하는 여자의 행동방식은 곧바로 더 많은, 더 경쟁력 있는 후손을 만들게 되고(여기서 경쟁력이란 유전자를 더 널리 퍼뜨린다는 의미), 그 후손들 역시 부모에게서 그러한 형질을 물려받을 확률이 크다. 그리하여 그러한 형질은 계속 퍼져 나가고, 사실상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성에 관련된 행동을 정자전쟁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성적인 행동을 과학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어른들의 사회생활에는 물론, 학생들의 성교육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런 이해를 돕는 좋은 책으로 '털없는 원숭이'를 꼽았는데, 이 책은 좀 더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생물학적(분자생물학적, 생리학적)인 분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물질의 성질을 정말로 이해하는 데 원자 수준의 설명이 필요하듯이, 그냥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인간의 행동은 너무 복잡하고, 무규칙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자전쟁'이나 'DNA' 처럼 상식만 가지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이 그 배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모든 현상이 일관성 있게 설명된다.
저자: 로빈 베이커
출판사: 이학사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나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곤란한 현상들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성교가 번식을 위한 활동이라면, 임신 가능성에 관계 없이 수시로 성교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라서? 하지만 다른 동물들 중에도 이런 경우는 많다.
이 책은 인간의 성에 관련된 행동 방식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간다. 거기에는 유전자 수준, 세포(정자, 난자) 수준, 사회적 수준의 원인들이 얽혀 있고, 이 모든 현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진화' 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 책은 37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먼저 성적인 행동의 전형적인 예를 말해 주는 가상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이야기의 상황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나온다. 그 가상의 이야기는 거의 "야설" 처럼 보이지만 과장이나 왜곡 없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과학적인 설명 부분은 각 <장면>에 대해 일관성 있는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 이론의 핵심에 '정자전쟁' 이라는 개념이 있다. 정자전쟁은 한 여자의 몸 안에 짧은 간격을 두고 여러 남자의 정자가 들어왔을 때, 서로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긴 편의 정자가 난자를 수태시킨다(가임기인 경우). 인구의 4%가 정자전쟁을 거쳐서 수태되어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별것 아닌 수치처럼 보이지만, 정자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남자의 행동방식, 그리고 좀 더 경쟁력 있는 자식을 만들기 위해 정자전쟁을 적절히 이용하는 여자의 행동방식은 곧바로 더 많은, 더 경쟁력 있는 후손을 만들게 되고(여기서 경쟁력이란 유전자를 더 널리 퍼뜨린다는 의미), 그 후손들 역시 부모에게서 그러한 형질을 물려받을 확률이 크다. 그리하여 그러한 형질은 계속 퍼져 나가고, 사실상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성에 관련된 행동을 정자전쟁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성적인 행동을 과학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어른들의 사회생활에는 물론, 학생들의 성교육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런 이해를 돕는 좋은 책으로 '털없는 원숭이'를 꼽았는데, 이 책은 좀 더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생물학적(분자생물학적, 생리학적)인 분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물질의 성질을 정말로 이해하는 데 원자 수준의 설명이 필요하듯이, 그냥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인간의 행동은 너무 복잡하고, 무규칙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자전쟁'이나 'DNA' 처럼 상식만 가지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이 그 배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모든 현상이 일관성 있게 설명된다.
[책] 국가란 무엇인가 - 국가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제목: 국가란 무엇인가
저자: 유시민
출판사: 돌베개
학교 일로 '계획서' 라는 것을 많이 쓰게 되는데 계획서의 맨 앞에 '목적'을 밝히는 것은 그 사업(예를 들어 교육과정 운영, 부진학생지도 등)을 '왜' 하는지가 그 이후의 모든 것(누가, 언제, 어떻게 등)을 결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철학이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철학이란, 정치를 왜 하는지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왜' 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에 답해야 한다. 사실 '정치를 왜 하는가' 와 '정치란 무엇인가' 는 같은 질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에 답함으로써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도 따라올 것이다.
나는 원래 정치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정치란 정치가들이 하는 전문 분야로, 나는 몰라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국가에도 정치가 있지만, 가정에도 정치가 있었고, 학교에도, 수학교사모임에도 정치가 있었다. 작은 집단이건 큰 집단이건,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무엇인가를 할 경우 필연적으로 그 집단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고, 그 결정할 권리를 누가 가지며, 어떤 식으로 행사하느냐 하는 문제가 바로 정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다른 집으로 이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가족 모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세금을 얼마나 걷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어떤 행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결정할 권리가 '국가' 에 있다. 국가는 폭력(군대와 경찰)으로 지구의 일부를 점령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결정을 강제한다. 몇몇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나몰라라 하기에는, 국가의 결정은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나와 같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는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세 갈래의 생각인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을 제공한 다음,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자의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 워낙 담담하게 해설해 놓아, 평소 내가 '수구기득권세력' 이라 부르며 자기가 가진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면서 약자를 수탈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 자들이라고 경멸했던 사람들도 어쩌면 국가에 대한 생각이 다를 뿐 공존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들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렇다. 비록 현재 정권(국가를 어떻게 운영할지 결정할 권리)을 잡고 있는 국가주의자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국가안보', '국익'이 우선이기 때문인 것이다. 반면 나에게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들로부터 정권을 빼앗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국가의 우선순위를 바꾸기 위해서(즉,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이지, 그들이 나쁜 놈들이라서가 아니다(물론, 많은 '나쁜 놈들'이 이 국가주의자들이 만든 환경에 기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이다. 말하자면, '적'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유시민처럼 자유주의자에 속할 것이다. 국가안보나 국익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자(파시스트)는 절대로 아니고, 국가가 자본가들의 집행위원회일 뿐이므로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가 일정한(그러나 제한되고 통제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인인 저자 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국가라는 것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에 차례로 서 보고, 자신의 것과 다른 시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유시민
출판사: 돌베개
학교 일로 '계획서' 라는 것을 많이 쓰게 되는데 계획서의 맨 앞에 '목적'을 밝히는 것은 그 사업(예를 들어 교육과정 운영, 부진학생지도 등)을 '왜' 하는지가 그 이후의 모든 것(누가, 언제, 어떻게 등)을 결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철학이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철학이란, 정치를 왜 하는지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왜' 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에 답해야 한다. 사실 '정치를 왜 하는가' 와 '정치란 무엇인가' 는 같은 질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에 답함으로써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도 따라올 것이다.
나는 원래 정치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정치란 정치가들이 하는 전문 분야로, 나는 몰라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국가에도 정치가 있지만, 가정에도 정치가 있었고, 학교에도, 수학교사모임에도 정치가 있었다. 작은 집단이건 큰 집단이건,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무엇인가를 할 경우 필연적으로 그 집단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고, 그 결정할 권리를 누가 가지며, 어떤 식으로 행사하느냐 하는 문제가 바로 정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다른 집으로 이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가족 모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세금을 얼마나 걷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어떤 행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결정할 권리가 '국가' 에 있다. 국가는 폭력(군대와 경찰)으로 지구의 일부를 점령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결정을 강제한다. 몇몇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나몰라라 하기에는, 국가의 결정은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나와 같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는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세 갈래의 생각인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을 제공한 다음,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자의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 워낙 담담하게 해설해 놓아, 평소 내가 '수구기득권세력' 이라 부르며 자기가 가진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면서 약자를 수탈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 자들이라고 경멸했던 사람들도 어쩌면 국가에 대한 생각이 다를 뿐 공존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들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렇다. 비록 현재 정권(국가를 어떻게 운영할지 결정할 권리)을 잡고 있는 국가주의자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국가안보', '국익'이 우선이기 때문인 것이다. 반면 나에게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들로부터 정권을 빼앗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국가의 우선순위를 바꾸기 위해서(즉,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이지, 그들이 나쁜 놈들이라서가 아니다(물론, 많은 '나쁜 놈들'이 이 국가주의자들이 만든 환경에 기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이다. 말하자면, '적'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유시민처럼 자유주의자에 속할 것이다. 국가안보나 국익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자(파시스트)는 절대로 아니고, 국가가 자본가들의 집행위원회일 뿐이므로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개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가 일정한(그러나 제한되고 통제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인인 저자 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국가라는 것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에 차례로 서 보고, 자신의 것과 다른 시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우주의 기원 백뱅 -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제목: 우주의 기원 빅뱅
저자: 사이먼 싱(곽영직 역)
출판사: 영림 카디널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모아서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사이먼 싱의 솜씨는 과학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두 번째 책인 <암호의 과학>에서도 그랬듯이 이 책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탐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연결지어 설명하면서 그것들을 가지고 커다란 한 줄기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 이야기란,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이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 이것은 이론이 관찰 결과와 맞지 않아 위기에 처했을 때,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기보다 기존의 이론을 '땜질'하는 식으로 문제를 피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땜질'이 성공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론이 받아들여짐으로써 과학적 지식은 발전하는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빅뱅' 이론이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기까지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과 그에 대항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몇 차례나 반복되며 역사를 만들어 왔다. 이 책은 그 역사를 흥미진진한 드라마와 같이 펼쳐 나가며 우주의 기원이라는 특정한 주제만이 아닌, 과학 전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해 줄 것이다.
저자: 사이먼 싱(곽영직 역)
출판사: 영림 카디널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모아서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사이먼 싱의 솜씨는 과학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두 번째 책인 <암호의 과학>에서도 그랬듯이 이 책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탐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연결지어 설명하면서 그것들을 가지고 커다란 한 줄기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 이야기란,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이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 이것은 이론이 관찰 결과와 맞지 않아 위기에 처했을 때,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기보다 기존의 이론을 '땜질'하는 식으로 문제를 피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땜질'이 성공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론이 받아들여짐으로써 과학적 지식은 발전하는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빅뱅' 이론이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기까지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과 그에 대항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몇 차례나 반복되며 역사를 만들어 왔다. 이 책은 그 역사를 흥미진진한 드라마와 같이 펼쳐 나가며 우주의 기원이라는 특정한 주제만이 아닌, 과학 전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해 줄 것이다.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학
제목: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학
저자: 오가와 요코 + 후지와라 마사히코
출판사: 이레
작가인 오가와 요코가 수학자 후지와라 마사히코 교수와 대화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오가와 요코는 스스로 학창시절 수학을 가장 꺼려했던 과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그가 기억이 80분밖에 유지되지 않는 수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후지와라 교수의 '개인교습'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학>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대한 수학적 해설서라고도 할 수 있다. 수학에는 문외한인 작가가 '한 순간도 따분하지 않았고' '새로운 지평이 잇따라 눈앞에 펼쳐지면서 수많은 질문이 솟아났다' 라고 말하듯이, 이 책의 내용은 수학을 모르는 사람도 간접적이나마 수학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집중력과 연애의 상관관계', '노벨상에 수학상이 없는 이유' 등, 옆길로 빠지는 대화 내용들도 수학이 어떤 활동이고 수학자는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또 한가지,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과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면 특이하게 영화 쪽이 수학적인 내용을 더 많이 담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영화를 만들 때 이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학>을 참고했던 것 같다.
[책] 끝없는 이야기 - 환타지엔에도 수학이!
제목: 끝없는 이야기
저자: 미하엘 엔데
출판사: 비룡소
지금 구할 수 있는 것은 비룡소에서 나온 '끝없는 이야기' 라는 제목의 번역판이지만 내가 읽은 것은 오래 전에 나온 '네버엔딩스토리'라는 제목의 번역판이다. 더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은 내가 읽은 쪽이라고 생각된다. 그 번역판에서는 독일어로 된 고유명사(?)들의 발음을 의도적으로 바꾸어 옮기기도 했는데, 그래서 아래에 쓴 이름들은 원작이나 비룡소판의 이름들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든 생각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다 생각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였다. 그 자체가 하나의 바위산인 생물 피욜룬하츨그나 거대한 거북 몰라를 비롯한 수많은 환타지엔(환상세계)의 생물(괴물?)들, 엘펜바인 탑, 남쪽 계시소, 천의 문을 가진 사원, 안개의 바다 스카이단 등 환타지엔 안의 장소들, 이야기로 만들어진 환타지엔이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짓지 않아 없어져 간다든가, 이야기를 지어낼 때마다 거기에 등장하는 것들이 환타지엔에 '이미 있던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든가 하는 아이디어... 나같으면 이런 수많은 생물이나 장소의 이름을 짓는 것만 해도 큰 일일 텐데, 작가는 하나하나 자세히도 묘사해 놓았다. 그 상상력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쉴새없이 등장하며 펼치는 모험 이야기에 나 자신이 바스티안처럼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몰입하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수학적인 개념과 이어지는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바람에 더 놀라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이 책의 어떤 부분은 같은 해(1979)에 나온 더글러스 호프슈태터의 고전적인 수학책 <괴델, 에셔, 바흐(Gӧdel, Escher, Bach: Eternal Golden Braid)>의 어떤 부분과 흡사하다. 예를 들어
- 작은 곤충들이 모여서 하나의 생물이 되는 군집자 이글라물은 <괴델 에셔 바흐>에서는 개미집(Aunt Hillary)으로 나타나며, 집합이 각 원소들과는 별도의 성질을 갖는다든가, 각 부분에 간단한 규칙을 적용해 전체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수학적 아이디어와 통한다.
- 이 책의 제목은 '네버엔딩스토리' 인데 이 책 안에서 바스티안이 읽고 있는, 환타지엔을 묘사한 책의 제목도 '네버엔딩스토리'이다. 바스티안이 읽고 있는 그 책 안에 다시 '네버엔딩스토리' 라는 책이 등장하는데, 그 세 권의 책이 사실 모두 같은 책임이 밝혀지고, 자기 안에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이 책은 어느 순간 처음으로 돌아가 바스티안이 '시스템을 붕괴시킬' 때까지 무한히 반복된다. 자기 안에 자기 자신을 포함한다는 아이디어는 수학에서는 (하도 많이 거기에 시달려서) 이제 새로울 것도 없지만 항상 역설을 내포하며 수학이라는 시스템을 붕괴시킬 가능성을 갖고 있는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괴델 에셔 바흐>의 주제는 괴델의 불완전성정리인데, 그 증명의 아이디어가 바로 명제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게 만드는 것이며, <괴델 에셔 바흐>에서 그러한 아이디어는 아킬레스와 거북의 난감한 대화의 형태로 유머러스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하게 된 또 하나의 아이디어는, 이야기 속의 세계라는 개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이 세상의 누군가가 이야기를 지어내면 등장인물은 환타지엔에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 그 자체의 세계가 있다는 아이디어는 풍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죽었다' 고 쓰면 그 인물은 그 부분에서 죽겠지만 책을 앞뒤로 넘길 수 있는 누군가에게는 책이 존재하는 한 계속 존재하는 것 아닌가? 전설적인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의 한 편에서도 가상현실장치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 장치를 끄면 스스로의 존재가 없어지는 데 대해 걱정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모든 이야기는 그 자체의 세계를 갖고 있고 책은 그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이 이야기이고 우리 자신이 등장인물인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라는 존재는 유한하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가 펼친 이야기는 이 세상이라는 '끝없는 이야기'가 펼쳐져 나가는데 무한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제목이 '네버엔딩스토리' 인 이유는, 위에서 말한 이유로 끝없이 반복된다는 데에도 있지만 이 책의 많은 장면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므로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는 식으로 미루어 둔 수많은 이야기들이 끝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나의 이야기] 나를 만든 책들
제목: 코스모스(Cosmos)
저자: 칼 세이건
출판사: 주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 것은 이 책 때문이다.
<코스모스>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지질, 천문) 등 모든 과학 분야를 아우르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교양과학서적이다. 세계적으로도 과학을 대중화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책이라고 알고 있다.
과학의 여러 가지 개념들을 소개하지만,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외계 생명체를 찾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설명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외계' 를 설명하기 위해 지구와 지구의 역사, 은하계, 빅뱅 같은 것을 말하고, '생명체' 를 설명하기 위해 세포, 화학 반응, 원자, 전자 등을 말하는 식이다. 앞에서 나온 내용이 복선 역할을 해서 뒤에서 다시 사용되고 하기 때문에 소설책보다도 재미있게 읽었고, 사실 그 이후 몇 년간 10번도 넘게 읽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과학에 빠져서 일반 소설 같은 것은 거의 안 읽었다.)
이 책 덕분에, 처음 읽었을 때 초등학교(당시 용어로 국민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이었던 내가 '상대성 이론', '진화론', '쿼크', 'SETI' 같은 말들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나의 관심은 그런 것들로 향했다. 그 전에는 장래 희망을 써내라고 하면 '과학자' 라고 써내기는 했지만 과학이라는 것은 '마징가 Z'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정도로, 과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구체적인 과학의 내용을 알려 주었고, 나도 그런 것들을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했다.
칼 세이건 자신이 초등학교 때 도서관에 가서 '별(Stars)' 에 대한 책을 찾았더니 직원(사서인 듯)이 연예인 사진이 잔뜩 실린 책들을 가져다 주더라는 일화도 나와 있는데, 그것도 나 자신을 그와 동일시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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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별의 물리(星の物理)
저자: 기다무라 마사도시
출판사: 전파과학사
나의 지식은 상당부분 <별의 물리>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집에 있던 백과사전(과목별로 된 학습백과사전이었음)의 '과학' 부분을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고, 어떤 친구 집에 전집으로 된 '과학 학습 만화'가 있는 것을 알고 그 친구 집에 상당 기간 드나들면서 수십 권짜리 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읽기도 하는 등으로 과학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중학생이 되니 영어 사전을 사야 한다길래 사전을 사려고 들른 동네 서점 맨 위 구석에 있던 볼품없는 작은 책에 <별의 물리>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펼쳐 드니 북극성이 짝별(연성 - 두 별이 서로를 돌고 있는 것)이라는 등 매우 구체적인 별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 같아서 사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 것이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은 <코스모스> 같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책에는 싣기 어려운 내용도 거침없이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밝고 유명한 별들(북극성, 처녀자리 스피카, 마차부자리 카펠라, 오리온자리 베텔기우스 등등)의 물리적 특성에 대해 나와 있었는데, '가리는 짝별(식연성)', '로슈 한계', '케페이드형 변광성', '메시에 목록' 같은 전문 용어들이 쉴새없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을 또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가는 것으로 봐서 분명 전문서적은 아니고 교양서적이었다.
작지만 굉장히 배울 것이 많았던 그 책을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앞 표지에 쓰여 있는 내용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현대과학신서 115"
그러니까 이런 책이 적어도 114권이 더 있다는 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2-3주에 한 번씩 주말에 지하철을 2번 갈아타고 '종로서적'에 가서 현대과학신서 시리즈를 살펴 보고 그 중에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을 한 권, 두 권씩 사 오는 일을 습관처럼 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리즈로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블루백스' 도 사서 읽었다. 나중에는 다른 책들이나, 음반도 사게 되었다. 그런 일상은 대학에 가서까지 계속되었는데, 나에게는 그런 큰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고, 책을 사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 때 샀던 책의 제목을 몇 개만 말해 보면 <양자역학적 세계상>, <현대물리학 입문>, <상대론적 우주론> 이런 것이다. 하나같이 전문적인 내용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해설해 주는 훌륭한 책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읽으면서 내가 받은 지적인 충격과 감동은 말로써는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사실 코끼리의 다리도 아닌 발가락 정도에 불과함을 일찍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수학에 대해서는 그런 '선행학습'이 별로 없어서 대학에서 좀 헤맨 경험이 있다.)
===============================================================
제목: 교육의 목적과 난점
저자: 이홍우
출판사: 교육과학사
내가 교육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책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책에서 감명을 받은 것은 이 책을 읽었을 때가 처음인 것 같다.
대학 2학년 때, 같은 과 동기들은 거의 모두 '교육철학' 이라는 과목을 수강했고 나는 부전공때문에 수강하지 못했다.
그 때 교수님이 추천한 책이라길래 사서 지하철로 통학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교육이라는 것에 대한 나의 관점을 갖게 해 주었다.
그 전까지는 교육이란 지식을 전달하는 것, 학생이 잘 되게 해 주는 것 등등, 한마디로 막연한 생각밖에 없었다.
이 책은 교육이 무엇인지(혹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교육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서는 교육이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은 무엇을 하기 위한 활동인가, 다시 말해 교육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목적' 이라는 말의 뜻을 분석하는데, 이런 것이 철학적 논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의 목적이 경제성장이라고 한다면 그 '목적'은 교육과는 별개로 있는 것이며 교육을 그 수단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외재적 목적).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교육이라는 말의 뜻 그 자체가 그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내재적 목적).
또한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은 배운 다음에야만이 알 수 있고, 배우기 전에는 왜 그것을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 교육의 근본적인 난점(어려움)이다. 교육을 받아야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일단 교육 받도록 사람들을 유혹하는 거짓말일 뿐이지, 그것이 교육을 받는 진짜 목적(내재적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거짓 목적(외재적 목적)이 진짜 목적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런 식으로 다음 세대를 교육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몇 편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대부분 강연 원고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냥 죽 읽어나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적절한 비유를 사용해 더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많았다.
나중에, 이 책의 저자인 이홍우 교수가 번역한 교육학 책을 두 권 읽었는데 하나는 피터스(R.S.Peters)의 <윤리학과 교육>, 또 하나는 듀이(J. Dewey)의 <민주주의와 교육>이다. 피터스는 듀이에 대해 '상식에 학문이라는 옷을 입혔을 뿐' 이라고 비판했을 정도로 상반된 관점을 갖고 있다. 내가 두 책을 모두 읽어 봐도(이 두 책에 대한 이홍우의 번역은 완벽에 가깝다) 피터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분석철학(언어의 뜻을 분석하고 그것을 가지고 논증하는 방식)에 입각한 그의 이론 전개는 수학적인 증명과도 비슷해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이런 책들은 내가 교육이라는 것, 그리고 학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저자: 칼 세이건
출판사: 주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 것은 이 책 때문이다.
<코스모스>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지질, 천문) 등 모든 과학 분야를 아우르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교양과학서적이다. 세계적으로도 과학을 대중화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책이라고 알고 있다.
과학의 여러 가지 개념들을 소개하지만,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외계 생명체를 찾는 과학자들의 노력을 설명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외계' 를 설명하기 위해 지구와 지구의 역사, 은하계, 빅뱅 같은 것을 말하고, '생명체' 를 설명하기 위해 세포, 화학 반응, 원자, 전자 등을 말하는 식이다. 앞에서 나온 내용이 복선 역할을 해서 뒤에서 다시 사용되고 하기 때문에 소설책보다도 재미있게 읽었고, 사실 그 이후 몇 년간 10번도 넘게 읽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과학에 빠져서 일반 소설 같은 것은 거의 안 읽었다.)
이 책 덕분에, 처음 읽었을 때 초등학교(당시 용어로 국민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이었던 내가 '상대성 이론', '진화론', '쿼크', 'SETI' 같은 말들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나의 관심은 그런 것들로 향했다. 그 전에는 장래 희망을 써내라고 하면 '과학자' 라고 써내기는 했지만 과학이라는 것은 '마징가 Z'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정도로, 과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구체적인 과학의 내용을 알려 주었고, 나도 그런 것들을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했다.
칼 세이건 자신이 초등학교 때 도서관에 가서 '별(Stars)' 에 대한 책을 찾았더니 직원(사서인 듯)이 연예인 사진이 잔뜩 실린 책들을 가져다 주더라는 일화도 나와 있는데, 그것도 나 자신을 그와 동일시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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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별의 물리(星の物理)
저자: 기다무라 마사도시
출판사: 전파과학사
나의 지식은 상당부분 <별의 물리>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집에 있던 백과사전(과목별로 된 학습백과사전이었음)의 '과학' 부분을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고, 어떤 친구 집에 전집으로 된 '과학 학습 만화'가 있는 것을 알고 그 친구 집에 상당 기간 드나들면서 수십 권짜리 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읽기도 하는 등으로 과학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중학생이 되니 영어 사전을 사야 한다길래 사전을 사려고 들른 동네 서점 맨 위 구석에 있던 볼품없는 작은 책에 <별의 물리>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펼쳐 드니 북극성이 짝별(연성 - 두 별이 서로를 돌고 있는 것)이라는 등 매우 구체적인 별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 같아서 사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 것이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은 <코스모스> 같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책에는 싣기 어려운 내용도 거침없이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밝고 유명한 별들(북극성, 처녀자리 스피카, 마차부자리 카펠라, 오리온자리 베텔기우스 등등)의 물리적 특성에 대해 나와 있었는데, '가리는 짝별(식연성)', '로슈 한계', '케페이드형 변광성', '메시에 목록' 같은 전문 용어들이 쉴새없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을 또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가는 것으로 봐서 분명 전문서적은 아니고 교양서적이었다.
작지만 굉장히 배울 것이 많았던 그 책을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앞 표지에 쓰여 있는 내용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현대과학신서 115"
그러니까 이런 책이 적어도 114권이 더 있다는 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2-3주에 한 번씩 주말에 지하철을 2번 갈아타고 '종로서적'에 가서 현대과학신서 시리즈를 살펴 보고 그 중에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을 한 권, 두 권씩 사 오는 일을 습관처럼 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리즈로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블루백스' 도 사서 읽었다. 나중에는 다른 책들이나, 음반도 사게 되었다. 그런 일상은 대학에 가서까지 계속되었는데, 나에게는 그런 큰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고, 책을 사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 때 샀던 책의 제목을 몇 개만 말해 보면 <양자역학적 세계상>, <현대물리학 입문>, <상대론적 우주론> 이런 것이다. 하나같이 전문적인 내용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해설해 주는 훌륭한 책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읽으면서 내가 받은 지적인 충격과 감동은 말로써는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사실 코끼리의 다리도 아닌 발가락 정도에 불과함을 일찍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수학에 대해서는 그런 '선행학습'이 별로 없어서 대학에서 좀 헤맨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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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육의 목적과 난점
저자: 이홍우
출판사: 교육과학사
내가 교육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책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책에서 감명을 받은 것은 이 책을 읽었을 때가 처음인 것 같다.
대학 2학년 때, 같은 과 동기들은 거의 모두 '교육철학' 이라는 과목을 수강했고 나는 부전공때문에 수강하지 못했다.
그 때 교수님이 추천한 책이라길래 사서 지하철로 통학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교육이라는 것에 대한 나의 관점을 갖게 해 주었다.
그 전까지는 교육이란 지식을 전달하는 것, 학생이 잘 되게 해 주는 것 등등, 한마디로 막연한 생각밖에 없었다.
이 책은 교육이 무엇인지(혹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교육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서는 교육이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은 무엇을 하기 위한 활동인가, 다시 말해 교육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목적' 이라는 말의 뜻을 분석하는데, 이런 것이 철학적 논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의 목적이 경제성장이라고 한다면 그 '목적'은 교육과는 별개로 있는 것이며 교육을 그 수단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외재적 목적).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교육이라는 말의 뜻 그 자체가 그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내재적 목적).
또한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은 배운 다음에야만이 알 수 있고, 배우기 전에는 왜 그것을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 교육의 근본적인 난점(어려움)이다. 교육을 받아야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일단 교육 받도록 사람들을 유혹하는 거짓말일 뿐이지, 그것이 교육을 받는 진짜 목적(내재적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거짓 목적(외재적 목적)이 진짜 목적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런 식으로 다음 세대를 교육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몇 편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대부분 강연 원고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냥 죽 읽어나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적절한 비유를 사용해 더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많았다.
나중에, 이 책의 저자인 이홍우 교수가 번역한 교육학 책을 두 권 읽었는데 하나는 피터스(R.S.Peters)의 <윤리학과 교육>, 또 하나는 듀이(J. Dewey)의 <민주주의와 교육>이다. 피터스는 듀이에 대해 '상식에 학문이라는 옷을 입혔을 뿐' 이라고 비판했을 정도로 상반된 관점을 갖고 있다. 내가 두 책을 모두 읽어 봐도(이 두 책에 대한 이홍우의 번역은 완벽에 가깝다) 피터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분석철학(언어의 뜻을 분석하고 그것을 가지고 논증하는 방식)에 입각한 그의 이론 전개는 수학적인 증명과도 비슷해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이런 책들은 내가 교육이라는 것, 그리고 학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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