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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9일 토요일

[교육] 경쟁과 경쟁력

흔히 경쟁을 유발하면 경쟁력이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지 잠시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무제한의 경쟁,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경쟁력이 강한 쪽이 승리한다. 그 다음은? 한번 승리한 쪽은 계속 승리한다. 아니 경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승자가 ‘독식’을 할 뿐이다. 이와 같이 아무 제약 없는 경쟁은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추기지 않아도 경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과당 경쟁을 막아야 그 시스템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경우, 학생과 학부모는 굉장히 큰 것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사회적 지위, 미래의 안락한 생활, 자아실현의 기회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승자독식’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승자가 되지 못하면 사회적 지위도, 안락한 생활도, 자아실현의 기회도 빼앗긴다? 극단적인 경쟁이 일어난다. 패자는 얻고자 했던 것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것까지 잃는다. 반면 승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차지한다. 오늘날 현실이 그와 가깝다.

그렇다면 ‘국민 개인의 기본적 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승자독식’을 막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교육에서 승자독식이란, 대학입시의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 번 서열 높은 대학에 입학하면 그것만으로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동문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하는 식으로 승승장구하는 반면, 그런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훨씬 더 노력해도 기회를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공교육이 그 목적을 이루려면 이런 상태를 막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경쟁을 놔둔 채로 입시제도나 고등학교 교육과정 같은 것을 바꿔서 사교육비나 공교육 불신 같은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면피용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 상태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 경쟁에서 이길 '실탄'이 충분한 자들이 하는 말이다.  정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경쟁을 약화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대학의 서열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논점 일탈이 등장한다.  대학의 서열은 기업들이 명문대 졸업생을 선호하기 때문이므로 기업들이 출신대학에 따른 차별을 안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대학이나 정부 쪽에서 만들어 낸, 책임전가용 멘트다.  내가 기업의 신입사원을 뽑는 담당자라고 생각해 보자.  수많은 지원자들의 능력이나 인성을 속속들이 파악할 방법은 어차피 없다.  주어진 정보로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  그런데 서열 높은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이미 '머리가 좋고, 윗사람 말 잘 듣고,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검증을 거친 것으로 봐야 한다.  출신대학을 고려하는 것은 기업으로서는 너무나 손쉽게 원하는 사원을 뽑을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이걸 어떻게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업에서 마지못해 출신대학을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인성을 보아 뽑는다고 선전을 할 지 몰라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대부분 유명한 대학 출신을 뽑고 구색맞추기로 유명하지 않은 대학 출신자 몇 명을 뽑아 놓고는 '이거 봐라, 우리 회사는 유명 대학 안 나와도 들어올 수 있다' 고 선전할 것이다.

그렇다.  그냥 대학서열을 인위적으로 없애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사실 대학서열의 정체는 '수능 커트라인 서열'에 불과하다.  수능 커트라인만 통일하면 대학 서열을 깨뜨릴 수 있다.  쉽지 않은가?  수능을 자격고사로 하여, 합격한 학생들은 모두 대학에 갈 수 있되 거주지 등을 고려하여 국가가 지정해 주는 대학에 가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대학에 강제할 필요도 없다.  국공립 대학들과 원하는 사립대학들만을 가지고 이런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 '공공대학 네트워크'에 세금을 과감히 투입, 등록금을 무상이나 매우 적은 금액으로 하면서도 교육의 질을 높인다.  그렇게 '공공대학 네트워크'에 못 들어간 학생들만 사립대학에 가는 상황을 만든다면 장기적으로 상당수 사립대학도 이 네트워크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 '공공대학 네트워크'가 고등학교 졸업자의 30%만 수용할 수 있어도 대학의 공공성과, 학교의 공공성은 현저히 개선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처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말해온 것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절차와 예산까지 나와 있을 정도다.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경쟁을 시킨다' 라든가 '기업에서 사람 뽑는 방법이 먼저 바뀌어야...' 따위의 헛소리는 무시하자.  경쟁을 억제해야 사회가 유지된다.   지금의 죽기살기식 경쟁의 원인은 대학서열이다.  그러니 대학 서열을 깨뜨려야 한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자유시장은 모든 것을 타락시킨다

제목: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What Money Can't Buy)
지은이: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옮긴이: 안기순
출판사: 와이즈베리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내 나름대로 한 단어로 표현하면 '외부효과'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이 용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내 생각에 그렇다는 것이다.

서로의 합의에 의한 '거래'는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한 쪽이라도 손해를 본다면 거래를 안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거래를 보장하면 보장할수록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오류인 이유는, 거래는 거래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래로 인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나 사회 전체에 주어지는 영향, 그것을 '외부효과'라고 한다.

예를 들어, 지하수를 퍼올려서 병에 넣어 팔면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에게는 이익이 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자유롭게 허용하면 지하수가 고갈되어 그 지역에 식수난이 오거나 땅이 내려앉아 많은 사람들이 큰 곤란을 겪게 된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하루 얼마 이상 퍼올리지 못하게 한다든지 하는 '규제'가 필요하다.  즉, 자유시장에만 맡겨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석유를 퍼올려서 파는 회사, 석유를 정제하여 휘발유로 만들어 파는 회사, 그 휘발유를 사서 차에 넣고 몰고 다니는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거래로 인해 그 당사자들은 이익을 볼 수 있겠지만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인류 전체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자유시장을 절대선인양 찬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어떤 재화나 서비스는 자유로운 거래의 대상이 되면 그 가치가 타락한다는 것인데(책에서는 '부패'라는 말을 썼는데, 타락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이것도 '외부효과'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콩팥(신장)의 거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자유시장주의에 입각하면, 기증자가 콩팥을 경매에 붙이는 것이 가장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콩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공급'하고, 기증자(이 경우 기증자라는 말이 부적당하겠지만)에게 가장 큰 보상을 하는 방법이 아닐까?  맞다.  거래 당사자만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 거래의 외부효과를 생각해 보면 어떤가?  이런 거래가 허용된다면 부자들은 쉽게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이식할 장기를 공급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인데, 사람들이 이런 상태를 납득할 수 있는가?  아마도 사회 불안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예로, 인구 억제를 위해 여자 한 명당 2명의 자녀를 출산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범죄로 간주하는 경우와, 여자 한 명당 2개의 출산권을 주고 이를 시장가격에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자.  인구 억제 효과는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출산권 시장이 있는 경우 부자들은 출산권을 사들여 더 많은 자녀를 낳을 수 있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더 많은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되어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역시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 사회 전체에 바람직하지 않은 '외부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든 예로 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운동경기장의 '스카이박스(luxury skybox)'였다.  전에는 대기업 임원과 일반 노동자가 똑같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바로 옆에 앉아서 함께 응원하며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돈을 많이 내는 회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 관람석인 스카이박스가 생기면서, 구단의 수입과 회원들의 만족도는 올라갔겠지만 운동경기 관람이라는 사회적 행위가 갖고 있던 사회통합의 효과는 사라지고 오히려 부자와 일반인의 이질감을 키우는 바람직하지 않은 '외부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무엇이든지 자유시장거래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장사꾼들이 판치고 있다.  하지만 효율성이니 경제성장이니 하는 그들의 주장을 한 꺼풀 벗기면, 사회 통합이나 인권, 평화 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희생시켜 돈을 벌려는 그들의 장삿속이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장사꾼들에게 속아 중요한 것들을 빼앗겨 왔다.  이제 여기서 더 이상 가면 사회가 버티지 못할 지경까지 가고 있다.  자유시장의 이러한 문제점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그러한 시도에 대해 확실히 '안 돼!'라고 외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교육] 사교육은 돈과 시간과 기회를 갈취하는 사기일 뿐

사교육이 좋은 것인데,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사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교육을 바로 세울 수 없다.
사교육 자체가 학생을 망치고 사회 전체의 공공성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세금으로 월급받는 자들이 사교육비를 줄였다며 생색내기도 한다.
이건 값이 싸니까 사교육 많이 하라는 것 아닌가?
이것은 사교육을 기정사실화, 합리화하는 것밖에 안된다.

사교육은 사회 병리현상이고, 사교육 업자는 불안 심리를 부추겨 가정의 돈을 갈취해 가는, 일종의 사기꾼이다.
사기꾼으로 하여금 한번에 1억 사기칠 것, 5천만원씩 두 번에 사기치게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사람들이 사교육 그 자체를 끊도록 해야 한다.
사교육은 여러모로 담배와 비슷하다(백해무익, 금단증상, 그것으로 돈 버는 자들이 교묘한 술수를 쓰고 있는 점 등).
끊으면 금단증상이 생긴다. 그래서 맨 처음에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하고 있다면 금단증상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
"사기꾼에게 돈을 갖다 바치고 정상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좀 이름 없는 대학 가거나 대학 안 가고 말겠다" 이런 마음으로 끊어야 한다. 물론 실제로 갈 대학을 못가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혹시 그렇게 되더라도 그러면 어때서?
학창시절의 6년은 어른이 된 후의 30년과 맞먹는 가치를 갖는다. 6년의 희생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그 학창시절을 사기꾼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사실 학원의 유일한 기능은 뭔가 배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학문이나 교수법의 문제가 아니다. 심리적인 것이다

일단 돈을 많이 받는다. 돈을 많이 주면 허접한 것도 좋아 보인다(물건도 그렇다). 심리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소비자 우롱이다. 다른 말로... 사기다.

그 다음, 입시가 엄청 복잡한 것이라고 거짓말한다.
입시가 복잡할 게 뭐가 있나?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 떼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원서 쓰고, 필요한 서류 제출하고, 합격 또는 불합격 판정 받는 것이다.
내용은 입시요강에 나와 있고, 대학별로 별로 다를 것도 없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입시를 엄청 복잡해서 학교 선생들도 못 봐준다고 말해서 학원 오게 만든다. 역시 사기다.

일단 학원에 오면, 단정적인 말로 믿음을 심어준다. 이건 꼭 나온다든지, 이런 말이 나오면 무조건 이렇게 하면 된다든지, 이런 말을 많이 쓴다. '믿슙니까' 하는 사이비 종교 수준이다. 실제로 맞느냐는 관계 없다. 어차피 입시가 끝나면 등쳐먹을 수 없으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일수록 사기꾼이지 않겠는가?

학원이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던가?
그런 느낌이 들 뿐이다.
공부하는 방법을 그렇게 많이 가르쳐 주었다면,
학원 다니다 그만두면 덜 불안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더 불안하지 않던가?
오히려 더 모르게 만든 것이다. 그래야 계속 학원을 다니니까.
학원에서 어떤 짓을 하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학원을 다닐수록 머리가 비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소비자(학생, 학부모)는 오직 돈을 갖다 바치는 봉일 뿐인 것이다.
사탕발림과 '믿슙니까' 로 계속 돈을 갖다 바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업무인 것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학원은 사기다.

사교육비가 아무리 떨어져도 소용 없다.
오히려 사교육비가 떨어지면 피해자가 늘어난다.
사교육은 유기농 식품처럼 좋은데 비싸서 못 사는 것이 문제인,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교육은 본질적으로 학생들의 미래를 파괴하고, 부모의 돈을 갈취하고, 사회의 공공성을 갉아먹는 존재다.

당신이 부모라면, 깨달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끔찍히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도 자식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현재 많은 부모들이 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돈을 위해 그것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사회] 마케팅

학문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마케팅’라는 용어가 자본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 중의 하나이다. 고등학교 때 상업 과목을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마케팅에 대해 갖고 있던 개념은 그것이 ‘광고’와 관련이 있다는 정도였다. 고등학교의 사회 과목과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에서는 워낙 기본적인 이론만을 공부하다보니 마케팅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없었고, 따라서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마케팅에 대해 애매한 개념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기회에 경영학과를 다니던 학생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신발 회사 직원이 오지에 있는 마을에 다녀와서 ‘그 곳에서는 아무도 신발을 신지 않으니 우리 회사가 진출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고, ‘그 곳에서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고, 따라서 우리 회사가 진출하면 경쟁 상대 없이 독점적으로 신발을 팔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다. 앞의 경우처럼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하는 것이 비즈니스라면, 뒤의 경우처럼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마케팅이다.
그 말은 내 생각 속에서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사회에서 듣고 보고 경험한 (얼마 안 되는) 것들이 논리적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수요’가 ‘필요’와 같은 말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수요는 기꺼이 돈을 내고 구입하려는 ‘충동’이다. 이것은 그것을 구입하여 얻는 유용성(효용)과는 다르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라도, 말하자면 사기를 쳐서라도 사게 만들면 수요가 창출된다. 반면 매우 필요한 물건이라도 돈이 없어서 못 살 형편이면 수요는 없다. 그런 관점에서 마케팅을 비판적으로 정의하자면, ‘필요 없는 물건(또는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활동’, 직설적으로 말해 ‘필요 없는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활동’이라고나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백과사전 같은 곳에는 ‘고객의 필요를 파악하고 고객에게 제품이나 서비스의 필요성을 알리는 등의 활동’ 이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 기업의 마케팅 부서에서 하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앞의 ‘비판적’인 정의가 더 유용한 것 같다.

자본주의의 폐해 중에서 상당한 부분은 이 마케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상품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만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필요보다 더 많이 사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지금 당연한 듯 행해지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기업의 본질을 망각한 행위다.  자기들의 수익을 위해 손님들의 윤택한 삶을 희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업들의 마케팅을 규제하지 않고 방치하면 결국 소비자들을 ‘속이는(우롱하는)’ 행태로 가기 마련이고, 그러면 필요 없는 것을 잔뜩 사들이느라고 돈을 쓰고 정작 필요한 곳에 쓸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이것은 '착취'인 것이다.

이런 착취 행태는 우리 사회에서 흔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자가용 승용차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자동차 회사의 마케팅의 결과로 이렇게 된 것인가? 정말 어린 학생들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달에 수만 원의 요금을 내며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평균 14개월마다 휴대전화기를 새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일까? 많은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우는데 담배 회사의 마케팅 없이 이렇게 될 수 있을까? 화장품은? 아웃도어 의류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마케팅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서운 괴물인 것만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교육이 상품이 되어 마케팅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문학적인 등록금을 내고라도 대학에 꼭 가야만 할 것 같고, 그러기 위해 모든 여가시간과 돈을 쏟아 부어서 입시학원에 다녀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다. 이것은 교육이라는 ‘상품’에 대한 마케팅이 상당히 성공(?)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윤을 위해 이용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정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하여 돈을 쓰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된다면, 담배는 중독자 치료용으로만, 자가용 승용차는 대중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에서만 사용되고, 대학은 학문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서만, 학원은 학교 교육을 보충하기 위해서만 가게 될 것이다.

[나의 이야기] 신호등, 그리고 유전자

나는 바른생활 사나이다.
지나다니는 차가 없어도 횡단보도로, 그것도 녹색 불이 들어와야만, 그것도 횡단보도의 오른쪽으로만 건넌다.  하지만 나는 맹목적으로 ‘규칙은 무조건 지켜야한다’ 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느냐를 판단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 왔고, 거기에서 판단의 기준이 나온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이 변해 온 과정을 말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7 살 때의 일부터 비교적 일관성 있게 기억하는데) 빨간불일 때 길을 건너면 안 된다든지, 길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든지 하는 규칙들에 대해 의문 자체가 없었고(있었다면 오싹한 일일 것이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은 아주 ‘나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사건’ 이 일어났다.

그 때는 지금처럼 게임 같은 것이 있지도 않았고 TV 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 친구도 별로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싫어하던 나는 방과 후에는 방에 틀어 박혀 책을 읽는 것이 일과였는데,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과학, 기술, 지리, 역사 등 과목별로 되어 있는 ‘학생 백과사전’ 이 거의 전부였다. 그 중 도덕에 대한 부분은 여러 위인들의 일화를 통해 시간을 지켜야 한다든지(비스마르크), 정직해야 한다든지(워싱턴) 하는 덕목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화들만 재미있게 읽고 정작 거기서 말하는 것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처럼’ 학용품을 산다고 속이고 돈을 타서 과자(그 당시 상당히 인기 있는 과자가 있었던 것 같다) 를 사 먹으려고 할머니(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께 “100원만” 달라고 했다(액수는 정확하지 않다). 할머니께서 “뭐하게” 라고 물으시는 순간, 책에서 읽었던 ‘정직’ 에 대한 워싱턴의 일화 같은 것들이 떠올랐고,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과자 사 먹게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혼나면 혼나지 뭐’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께서 어떻게 대답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때 나는 도덕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생활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때부터 점차 나는 누구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판단에 의해서, 거짓말을 거의 안 하게 되었으며, 규칙 (특히 신호등) 을 지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착한 어린이’ 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은 착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대해 나는 그저 ‘나쁜 사람들’ 이라서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자라면서 나는 과학이나 수학 같은 과목에 관심을 가졌고 과학에 대한 교양서적도 많이 읽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중고등학교 6 년 동안 문학 작품이라고는 ‘죄와 벌’ 딱 한 권을 읽었을 뿐이고 그 기간에 읽은 과학 교양서적은 백 권도 넘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것이 점차 나를 ‘따져 보기 좋아하는’ 학생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과학(수학 포함) 책의 내용이란, 사물에 대해 “왜 그렇지?” “정말 그럴까?”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물음을 가지고 따져 들어가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심지어 딱 한 권의 문학 작품 ‘죄와 벌’ 을 읽을 때도 등장인물 사이의 가족 관계를 따져 수형도를 그려 가며 읽었다).

어쨌든, 따져 보기 좋아하는 학생이 된 내가 ‘사람들이 왜 규칙을 안 지키는가?’ 라는 문제를 따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나쁜 사람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은 허구다. 사람들은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규칙을 어겨 100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적발될 확률이 1/10 이고 적발되면 200에 해당하는 벌(손해) 을 받는다면 규칙을 어겼을 때 이익의 기댓값이 80이 된다. 이것은 규칙을 어기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이므로 규칙을 어기는 경향이 많아지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 적발될 확률을 1/2 이상으로 올리거나, 처벌을 강화해 1000 이상에 해당하는 벌을 주도록 하면 규칙을 어겨서 얻는 이익의 기댓값이 음수가 되므로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둑질한 자는 손목을 자른다’ 식의 가혹한 법률이 왜 생겨났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알게 된 현대적인 진화론이 다시 한 번 나의 사고방식을 바꿔 놓았다. 나는 그 때까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는 성선설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과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진화론에 의하면 지금의 생물들(인간 포함)의 다양한 모습과 행동방식은 유전자 사이의 생존 및 번식을 위한 경쟁의 결과이다.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나 자기의 가까운 친척(공통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게 하는 유전자(하나의 유전자가 아니겠지만)는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유전자와의 생존경쟁에서 져서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양적 전개 과정에 게임이론이라는 수학이 사용된다.)

이 내용을 알고 나서 다시 ‘사람들이 왜 규칙을 어기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답은 규칙을 어기는 것이 인간 본성에 따르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수십억 년의 생존경쟁을 거치면서 극히 이기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은 조금이라도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행동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은 대개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해를 끼치는 행동이 될 것이므로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그런 행동을 억제하는 규칙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모두 규칙을 지킬 때 나 혼자만 어기는 것은 더더욱 엄청난 이익을 가져온다. 이것을 방치하면 점점 규칙이 무시되어 사회가 붕괴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있는 여러 종류의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법률)와, 이기적인 인간들을 ‘세뇌’ 시켜 서로 위할 줄 아는 사회적 인간으로 만드는 제도(교육)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본성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하는 것인 만큼 완벽하게 되기는 어려우며 큰 사회일수록 더 어렵다(작은 사회에서는 한 번 배신자로 낙인찍히면 엄청난 불이익이 오지만 큰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회생활이란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 전체의 공동 이익(공공성)이 충돌하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가 나의 결론이었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는 생각에 비해서 엄청나게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바른생활사나이’ 인 것은 규칙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내 나름대로 ‘따져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도 모르고 규칙을 지키라는 강제를 받게 되면 이기적인 본능에 의해 될 수 있으면 규칙을 어기려고 하게 되겠지만 그것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했기 때문에 거기에 즐겁게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나 책으로부터 ‘따져 보는’ 사고방식과 따져 나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행동을 만든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닐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배운 지식을 토대로 세상을 이해하며, 무엇이 가치 있고 어떤 행동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도 거기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학교에서 도덕이나 과학, 수학, 역사 같은 것을 왜 배우는가? 단편적인 지식 조각들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생각하는 방법을 ‘업그레이드’ 하는 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수학, 과학, 역사 같은 것을 배워서 그것에 비추어 보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세상을 지금보다 훨씬 좁고 얕게밖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알게 모르게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은 지식들로 인해 더 많은 것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냥 먹고 놀고 자는 인생이 아니라, 무엇인가 의문을 갖고 탐구하는(즉 따지는) 인생이 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배워서 생각하는 방법, 세상을 보는 방법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이야기] 지식과 삶과 교육

이 세상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꼭 두 가지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교사는 아주 적당한 직업이다. 지식을 가까이할 수 있고, 나 자신이 공부하는(즉,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교사는 공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인데 공교육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이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할 수 있다. 왜 공교육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요새 부쩍 많아진 것 같기 때문이다. 공교육이란 무엇인가? 공교육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개인이 알아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거기에 가서 배우도록 하지 않고 이러이러한 것을 가르쳐라, 학교는 어떻게 운영해라 하는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이유는, 의료기관을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게 의료에 관한 법을 만들고 보건소 같은 공공의료기관을 세운 이유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개인의 자선에만 맡기지 않고 복지에 관한 법을 만들고 공립 복지시설을 세운 이유와도 같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 문장은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인데, 말하자면 국가(정부)의 존재 이유를 말하고 있다(실제 이런 이유로 국가를 세웠다는 것은 아니고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선생은 각자 알아서 학원을 세우거나 가정교사로 취직하고, 자식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싶고 가르칠 능력이 되는 부모들은 자식을 학원에 보내거나 가정교사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잠깐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교육은 일부 계층이 독점한다. 교육을 받은 계층의 자녀들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그들끼리 서로 어울리고 교류하면서 학자가 되거나 사업을 하거나 관직에 진출한다.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나머지 가정의 자식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부모의 일을 돕거나 산업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따라서 재산을 모으는 것도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도 거의 원천 봉쇄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 벗을 수 없는 굴레가 됨을 의미한다. 공교육이 없었던 시절의 역사를 보거나, 지금도 공교육을 강제로 시행할 힘이 없는 일부 국가의 상황을 보면 명백한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가출 청소년이나 중퇴생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국가가 아무 일도 안하고 있으면 국민의 상당수가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다시 말해 배고픔을 채울 수 없거나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등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국가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고, 공교육이 그런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교사가 나에게 이처럼 좋은 직업이기는 하지만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세상을 이해하는 일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 기관사(내가 교사가 되지 못했을 때 택하려고 했던 직업)도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공부는 할 수 있고, 또한 지하철이라는 것도 오고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더욱 파괴된 환경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있었던 미래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있는 것 아닌가? 이처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는 사실상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비추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한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왜 위대한가?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공부에서도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빌 게이츠는? 돈을 많이 벌었을 뿐 그가 한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별로 위대하지 않다. 인터넷의 보급은 사회의 발전인가? 그렇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더 쉽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고 있으므로. 경제 발전을 위해 소비를 장려해야 하는가? 아니다. 자원낭비와 환경파괴로 미래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을 시장원리에 맡겨야 하는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의 탐욕을 채우는 대신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더해질 것이 확실하고, 특히 그로 인해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는 회화가 중요한가, 독해가 중요한가? 독해가 중요하다.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공부할 때 필요한 것이 그것이므로. 어떤 것이 옳은지, 또한 어떤 것이 가치 있는지 판단하는 나의 기준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과 대개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제 이러한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통해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현재 공교육은 제 구실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생각을 같이하지만 정작 그 이유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즉, 공교육이 학생들의 대학 시험 점수를 사교육만큼 못 올려주는 것을 가리켜 공교육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의 목적은 점수 올리기나 대학입시가 아닌데 왜 그것을 가지고 비교한단 말인가? 이것은 바둑 기사에게 왜 권투에서 권투선수를 못 이기냐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진짜 문제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에 속는 것인지 알고서도 그러는 것인지 ‘특목고, 자사고’에 간 학생이나 ‘인 서울’한 학생의 수에 연연하고 그 수를 늘리는 것을 학교의 최고 목표로 삼는 공교육 담당자들(교사, 교장, 심지어 교육감)이 많아지는 바람에 실제로 학교가 입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고통을 증가시킨다. 앞서 말한 나의 두 가지 기준으로 보면 ‘극악무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학생들이 고통 받고 있음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실제로 고통을 주는 것은 입시에서 뒤처지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고(이것은 어떤 학생에게 들은 말 그대로다)’, 따라서 입시에 자신의 미래 전체가 걸렸다고 믿는 그들 자신의 불안감과 공포감이다. 사교육 기관은 그런 마음을 부추겨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 한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홍보이고 마케팅이므로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담배회사처럼,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경우다). 학생들은 안 그래도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기 마련인데 사교육기관에 의해 그 불안감이 잔뜩 부풀려진 상태인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줄여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해 주면 된다. 그렇게까지 불안해하거나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 세상에는 경쟁에서 남을 이기는 것이나 잘 먹고 여행 많이 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일도 많다는 것, 그 중요한 것들을 찾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말해 주면 되는 것이다. 진실과 진짜 공부(세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사교육기관의 거짓말과 거짓 공부(문제유형 반복숙달)에 맞서는 것이 바로 공교육이 할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공교육기관이 사교육기관과 사실상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학교가 제 구실을 하려면 학원에 맞서 싸워 학생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하는데, 현실은 어느 쪽이 더 학생에게 고통을 많이 주는지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입시성적에 따라 학교가 망하거나 교장 또는 교사 월급이 깎이는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아무 이유 없이 자기네가 보호해야 할 국민에게 창을 들이댄다(이제는 그 이유를 만들어주겠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꿈이거나, 무슨 심시티같은 게임이었으면 좋겠다. 깨어나거나, ‘리셋’이라도 하게 말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의 경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 구조나 다른 내용들과의 관계 같은 것이 잘 파악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천재는 아니다. 윤리나 역사 같은 일부 과목은 이해가 잘 안 되어 시험 직전에 간신히 교과서 내용을 외우곤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싫었고 그래서 성적도 잘 안 나왔다. 과학처럼 역사도 수업 시간에 잘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잘 안 되었다. 그 때는 내가 과학에 소질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나중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중학생 때부터 백과사전과 교양서적을 통해 과학 분야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책의 내용은 대부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런 ‘배경 지식’이 그 분야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해 준 것이다. 비유하자면, 배경 지식은 바닷물 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그래서 떨어져 있는 섬들이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과학의 배경 지식은 지리, 음악, 국어 고전 등 다른 분야 과목의 공부에도 도움이 된 것 같은데 윤리나 역사와는 (그 때까지는) 잘 관련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학교 때(그 뒤로도 마찬가지) 교과에 관련도 없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책 읽을 시간은 많고 그 시간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책을 읽었던 이유는? 습관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왜 하필 과학이었나? 그것은 ‘취향’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런 경험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해 주었다. 내 경우의 윤리나 역사처럼 해서는 절대로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공부해야 한다. 독서의 습관, 교과 내용과 직접 관계가 없더라도 책을 (이왕이면 내용이 좋은 것으로) 많이 읽는 것, 새로 알게 되는 것을 이미 아는 것들과 이리저리 연결시켜 생각해 보는 것, 책에 있는 내용을 나 자신이나 주변 사물에 실제로 적용해 보는 것, 복잡하더라도 파고들면서 생각하는 것,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책 뒤의 해답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다), 아는 것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글로 표현해 보는 것 등이다. 설령 다른 학생이 나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공부했는데 성적이 나보다 훨씬 잘 나왔다고 해도, 나는 내가 했던 방법이 맞다는 생각을 안 바꿀 것이다. 그것이 성적을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진짜 공부’는 장기적으로는 성적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을 이루게 했고, 그렇게 공부한 지식은 나의 일부가 되고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여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가정을 꾸린 다음에는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는데, 차, 에어컨, 사교육 등 ‘돈 먹는 하마’들을 안 키울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고 인터넷 자료를 뒤지며, 혹은 글을 쓰며 공부를 한다. 거기서 새로 알게 된 내용은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의 그물’에 연결되어 내가 세상을 조금 더 넓게,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내가 보기에 공부의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지금 많은 학생들이 하고 있는 것은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 유형을 반복숙달하는 일일 뿐이고, 공부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아직 학생인데 항간에 떠도는 ‘괴담’에서처럼 책 읽을 시간도 없이 학원을 다녀야 하고, 공부(물론 시험에 나오는 과목)를 잘 하는지 감시당하고 관리당하는 생활을 한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학원에서는 입시 문제유형을 나열하고 하나씩 푸는 방법을 반복숙달시켜 줄 것이고, 학교는 그 흉내를 낸다. 섬만 보이고 그것들을 연결시켜 주는 바다 밑의 땅은 보지 못한다. 섬을 하나씩 외운다. 공부(라고 불리는 활동) 자체가 지겹지만 뒤처지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 한다니 할 수 없이 한다. 지식 속에 숨어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 가치관은 공백이 되고 탐욕이 대신한다(즉,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에 간다. 지겹지만 그 방법밖에 모르므로 취업을 위해 또 그런 문제유형 반복숙달식 공부를 한다. 취업을 한다. 나머지 인생도 탐욕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지겨운 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 방법밖에 모르므로 자식들을 학원에 보내고, 감시하고, 관리한다. 지겨움과 탐욕으로 채워진 인생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어 교과서에서 어떤 글을 읽고, 또는 인터넷 블로그에서 어떤 글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저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이 사교육의 독성을 중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고통 받는 사람은 계속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사교육이 돈벌이에 욕심내지 않고 학교 공부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도와주는 정도의, ‘사교육의 원래 기능’에 만족하면 여러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바둑을 두는데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 집을 채우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일을 제대로 하고 싶다. 제대로 공부하고, 지식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찾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더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학생들을 돕고 싶다. 그런데 교육이라는 이 게임에서 나의 적은 너무 많다. 학교 밖에도, 안에도, 교육청에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2011년 10월 11일 화요일

[과학] 기생충

기생충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기생충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회충, 요충과 같이 사람 몸 안에 살면서 양분을 가로채 살아가는 지렁이 비슷하게 생긴 동물일 것이다. 기생충의 ‘충’은 벌레라는 뜻이므로 기생충은 모두 작은 무척추동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기생충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생물 또는 무생물일 수 있다(벌레가 아닐 때는 기생생물이나 기생체 등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어미 새로 하여금 자기의 알을 부화시키고 돌보게 하는데, 다른 새의 노력을 가로채 번식을 하는 것이므로 기생충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또, 식물 중에는 광합성을 하지 않고 근처에 자라는 버섯으로부터 양분을 빼앗아 살아가는 ‘버섯만도 못한’ 것들이 있는데 이 역시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바이러스(독감 등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스스로를 복제할 수 없지만 다른 생물 세포의 복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기 복제를 한다. 바이러스를 생물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논란이 되지만 회충이 사람에 기생하듯이 바이러스가 다른 세포에 기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심지어 컴퓨터 바이러스는 실체가 없는 소프트웨어일 뿐이지만 다른 프로그램에게 돌아가야 할 메모리 공간과 중앙처리장치 실행 시간을 가로채 자기를 복제하고 사용자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므로 기생충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일반적으로 스스로는 살아갈 수 없고 다른 시스템에서 유용한 자원을 가로채어 자기를 위해 사용하면서 살아가는(유지, 확산해가는) 시스템을 기생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생충을 영어로는 parasite 라고 하는데, ‘식객(밥을 얻어먹는 자)’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생충이 이용하는 대상, 즉 ‘숙주’는 일반적으로 기생충의 활동에 의해 해를 입는다. 자기 한 몸을 위해 사용해야 할 영양분이나 자원으로 기생충까지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생충의 해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기생충이 자기 목적(유지, 확산)을 위해 어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가 스스로를 더 잘 확산시키려고 우리 몸으로 하여금 그런 반응을 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봐야 한다(물론 바이러스에게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특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더욱 잘 퍼져 나가 오늘날 창궐하고 있다는 것이다). 콜레라처럼 물을 통해 전염되는 병은 설사나 구토를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광견병의 경우는 더 무섭다. 광견병은 주로 동물이 다른 동물을 물었을 때 침을 통해 전염된다. 그러므로 광견병 바이러스는 침을 많이 흘리게 하는 동시에 화학적으로 ‘뇌를 조작하여’ 다른 동물을 물게 만든다. 보통 면역체계가 1-2주일 안에 광견병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그 짧은 기간을 이용해 자신을 다른 동물로 옮기게 하기 위해 숙주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사람의 경우 일단 광견병의 증상이 나타나면 중추신경(뇌, 척수)의 손상으로 100% 죽게 된다(그러나 감염된 후에라도 예방주사를 맞으면, 바이러스가 중추신경에 도달하기 전에 퇴치할 수 있다).

기생충들의 ‘악랄한’ 행태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반고환충의 유충은 송사리의 뇌 바깥에 기생하다가 그 송사리가 새에 잡아먹힐 때 새의 내장으로 들어가 성충이 된다. 따라서 송사리가 새에게 잘 잡아먹혀 줄수록 진반고환충이 더 잘 번식하게 된다. 그래서 유충은 송사리의 뇌 근처에서 화학물질을 분비, 송사리가 수면 근처에서 몸을 뒤집어 배를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경향을 보이도록 한다. 그 결과 송사리가 잡아먹힐 확률은 30배로 늘어나고 진반고환충이 더 쉽게 새의 몸으로 들어가게 된다. 새의 입장에서는 진반고환충 덕분에 송사리를 훨씬 쉽게 잡을 수 있는 셈인데, 이것은 그 지역 생태계의 균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런가 하면 게에 기생하는 소낭충은 아예 숙주를 자신에게 봉사하는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소낭충은 게의 배 부분에 자리잡고 게의 살 속으로 촉수 비슷한 것을 뻗어 양분을 빨아들이는데, 숙주가 된 게는 소낭충의 화학적 조작에 의해 번식 능력이 없어지고 오로지 소낭충을 보호하고 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행동만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식객’이 집을 차지해 버린 셈이다. 암세포는 주인이었던 인체를 배신하고 그 시스템을 자기 자신의 유지, 확산을 위해 사용하여 마구 번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숙주인 인체에 커다란 해를 끼치는 섬뜩한 기생충이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생충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칼 짐머(Carl Zimmer)의 책 「기생충 제국」(이석인 옮김, 도서출판 궁리, 2004)을 참고하기 바란다.

교묘한 방법으로 다른 생물의 몸 안으로 침입하고, 숙주의 면역체계를 바보로 만들며, 뇌를 화학적으로 조작하는 등의 창의적인, 어찌 보면 처절한 생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특이한 이웃에 대해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기생충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잃어버린 퇴화된 생명체도 아니고, 다른 세계에서 온 사악한 괴물도 아니다. 그들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적응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서 혹시 사람이 기생충과 비교되거나, 기생충이 사람과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사람이나 기생충을 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이므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사실 기생충은 결코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복잡성을 가진 시스템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만들었을 지하철 광고판 앞에 살짝 끼워 넣은 조잡한 전단지를 보라. 광고주와 광고 기획자, 디자이너 등 많은 사람의 노력에 살짝 편승하는 그 기생충스러움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속도로가 막힐 때 갓길을 질주하는 차들은 어떤가? 공공의 안전과 효율을 위해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고속도로라는 시스템을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솜씨가 기생충을 닮았다. 우리 사회를 안전하고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세금을 거두는 것인데 사회에서 받을 혜택은 모두 받으면서 그 세금을 가로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탈세범이나 탐관오리들, 불법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의 ‘면역체계’인 수사기관이나 세무기관을 구워삶아버리는 일부 재벌 기업들, 공익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회의 기생충에 불과하면서 사회를 지배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 앞에서 소개한 기생충들 중에서 그들과 흡사하게 살아가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기생충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므로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그런 일들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데 기생충에 대한 지식이 쓸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교육이라는 시스템은 어떨까? 여기서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법에 의해 통제되는 학교교육, 흔히 공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금이나 고속도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교육은 사회 전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내 직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공교육의 목적은 지식과 가치관을 다음 세대로 전달함으로써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동시에 개인의 존엄성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가르치는 수학이라는 학문은 수, 방정식, 함수, 도형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연구하는 것인데, 추상적인 개념은 많은 구체적인 것들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수의 계산 방법을 알아 놓으면 공깃돌의 개수를 헤아리는 데서부터 우주선을 설계하는 일까지 온갖 일에 사용할 수 있다) 수학은 수천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어 왔으며, 따라서 사회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데 수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바둑 동호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하듯이, 기초가 되는 수학적 지식을 공유하는 것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 진정한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공교육은 자기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소낭충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게처럼 엉망인 상태이다. 기본적으로 교육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인데, 그러기는커녕 사회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것은 교육이라는 시스템에 올라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교육의 방향을 엉뚱하게 틀어버리는 진반고환충이나 소낭충같은 인간들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생충은 아마도 다음에 나열한 자들일 것이다.

- 권력(득표)을 위해 포퓰리즘적인 교육정책(예:고교평준화 해체, 교원평가)을 밀어붙이는 정치인
- 자기 자식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특혜를 요구하고 반칙을 일삼는 일부 권력자들
- 공공 예산 빼먹기 바쁜 일부 교장, 행정실장, 업자들(그 유명한, 관료+업자 카르텔)
- 손님을 끌기 위해 공교육 불신을 조장하는 사교육 업자들
- 무능, 부패, 나태하여 교육을 오히려 방해하면서 월급만 챙기는 일부 교직원, 교육공무원들

기생충이 생기는 것을 그 기생충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기생충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도록 면역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그러고 나서 기존의 기생충을 하나씩 잡아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날이 올까 싶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해 가고 싶다.

2011년 5월 7일 토요일

[교육] 체벌 금지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기 위한 희생적 노력

우리 사회는 폭력에 절어 있는 사회입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폭력을 가르칩니다.
대학에서도 선후배간에 신체적, 언어적 폭력으로 '군기'를 잡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않습니까?

폭력의 가장 큰 문제는 당하면서 느끼는, 굴복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힘(완력 또는 권력)이 센 상대에게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험...
그것은 인생 전체에 주름이 지게 합니다.
자존감이 손상되고 세상을 자신있게 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는 많은 경우 그 굴욕감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폭력을 합리화하는 논리(위계질서, 애사심 등등)를 내면화합니다.

폭력(완력 또는 권력의 부당한 행사)과 굴복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
그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이제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질서를 핑계로 폭력을 합리화하는 정서가 더 강하게 될 만큼, 우리 사회는 폭력에 절어 있습니다.

폭력에 굴복하면서 자라고,
그러면서 위계질서니 뭐니 하며 폭력을 합리화하고,
그래서 고참이 되어, 부모가 되어, 교사가 되어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 때 당하던 폭력을 부모가 돼서 행하고
졸병 때 당하던 폭력을 고참이 돼서 행하고
학생 때 당하던 폭력을 선생이 돼서 행하고
이런 사회가 우리 사회입니다.

이 순환고리를 어디선가 끊어야 하는데,
그나마 제일 약한 고리가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육현장은 교육현장 그 자체를 위해서 폭력(체벌)을 금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사회 전체의 폭력적인 문화(?)를 해체해 나가기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벌을 금지하면 당연히 학교 현장은 혼란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폭력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야금야금 받아들이다가는 도로아미타불입니다.
담배가 필요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논리를 야금야금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지는 뻔한 것처럼, 폭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담배를 끊기 위해 이것저것 모든 여건과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계속 피우는 것이 옳습니까? 그러면 영원히 못 끊는다는 것은 모두 잘 아실 터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단 체벌 전면금지,
그리고 나서 금단증상을 억누르고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 사회는 영원히 폭력에 절어 있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속속 대안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체벌이 있었을 때는 체벌이라는 수단이 있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았던 여러 방안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노하우도 쌓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서 폭력적인 문화가 사라지면,
우리 사회 전체에서도 점차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교사들도 힘들고 학생들도 어수선하고 하겠지만,
참고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물러나면 그야말로 죽도밥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교육] 사교육의 정체

사교육 문제의 원인은 사교육입니다.  학원들이 자기들 손님끌려고 공교육 불신 조장한 것입니다.  그게 성공하여 수요가 폭발했고, 많이 하면 좋은 줄 알고 계속 시간을 늘리다보니 돈이 많이 듭니다.  공교육하고는 상관도 없이 학원과 학부모가 일으킨 일입니다.  사교육비가 부담된다?  왜 학원에 학원비 내리라고 압력은 못 넣지요?  왜 그 중 일부 또는 전부를 그만두지 않지요?  돈 적게 쓰면 경쟁에서 뒤떨어질까봐?  돈 적게 써서 좋은 대학(서열 높은 대학)못 들어갔다고 나중에 자식에게 원망 들을까봐?  그러면서 사교육비를 줄여달라?

교육의 목적은 입시경쟁에서 자기 학생들 앞서게 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육은 그냥 교육입니다.  인류 사회가 이룩한 가치 있는 것들을 전달해 줌으로써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그래서 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교육은 거기에 더해, 교육의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함으로써 신분이 형성되고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막는 기능도 있습니다.  어느 학교가 유명한 대학 많이 보내 주는지 경쟁시킨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중고교 평준화가 그나마 공교육의 명분이라도 세워주고 있는데 아예 합법적으로 그렇게 되면 공교육은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진, 그저 입시훈련이 되어 버리고, 인재 양성은 커녕, 광고에서 사라는 대로 물건 사들이면서, 사교육 업체에서 하라는 대로 자식들 비싼 학원 보내면서, 역시 돈쓰니까 뭐가 달라도 달라 이러기나 하는 좀비같은 무개념 소비자(일명 소비노예)만 양산할 것입니다(지금도 그런 사람 많지만 더 많아진다는 뜻).

지금 학원에서 '우수한 교육' 을 시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학원에서 하는 것은 시험문제유형 반복 숙달 훈련입니다.  이것은 교육의 방법이 아닙니다.  심지어 운전면허 필기시험에서 단시간에 점수 올리기 위해서도 사용하는 그런 방법으로 문학, 수학, 역사, 과학? (영어는 좀 될지도 모릅니다.  학문이 아니니까.) 그런 과목들을 제대로 공부해본 사람은 학원에서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을 알면 절대로 학원에 안 보낼 것 같습니다(제 경우도 그렇습니다).  차라리 점수 덜 받고, 덜 좋은 학벌로 사는 게 낫지, 인생의 큰 고비라고 할 수 있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문제유형 하나하나를 머리에 쑤셔 넣으면서 보낸다?  그것도 몇 년동안?  다른 걸 떠나서 우선 아동 학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할 시간과 의욕과 기회를 빼앗기는' 일입니다.  돈과 함께 말입니다.

교육 문제를 다루면서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사교육의 세례를 받았거나, 현재 자식들에게 많은 사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해 놓은 자기의 행동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가 해 놓은 행동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경향을 가집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자기 자식들을 오히려 사교육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아이들에게 학문들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는 부모들도 꽤 있음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저에게 사교육(입시를 위한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교육 서비스가 아니라 피해야 할 사회악입니다.

사교육은 담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백해무익하지만, 잠시 심리적인 안심을 시켜줄 수는 있습니다.  그 해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될수록 빨리 '끊는' 것입니다.  금단증상이 나타나겠지만, 그것을 극복해야 정상적인 삶(공부)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물론 사교육을 끊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남을 앞서려는 욕심에서 벗어나 '점수 덜 받고, 덜 유명한 대학에 가거나 대학 안 가도 된다' 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도 않으리라 봅니다.  공부를 제대로만 하면 사교육 받을 때보다 즐겁게 공부하면서 성적도 더 잘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단지 충분히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할 뿐...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교육] 학부모를 견제하는 것이야말로 학교가 할 일

학교는 공익을 위한 기관입니다.
학부모 개개인의 사익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공익이란 개개인의 사익의 합이 아닙니다.
교육의 이해당사자 중 가장 약자인 학생,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지요.
목소리 큰 학부모들이 아무리 반대한다 해도 옳은 일은 하는 것이 공공기관인 학교의 임무입니다.

옳은 일이란 대개 개인의 이기심을 견제하는 일입니다.
아무 견제 없이 개인의 이기심을 풀어놓으면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어 버립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신호등도 없고 교통경찰도 없이 개인의 이기심에 따라 차를 몰면 어떻게 될지만 생각해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도로교통법이나 '양심' 과 같은 견제장치들은 그런 이기심을 견제하여 공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교는 학부모의 이기심을 견제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입니다.
예를 들어 학부모가 사설모의고사를 원한다면, 그것을 '공익',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올바른 일인가' 에 비추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게 주장하는 학부모들의 '사익'에 비추어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교육기관은 그러지 않아도 되지요.
돈을 내는 학부모들의 이기심을 최대한 실현시켜 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를 정글로 만드는 일을 돕는 것이 그들의 일이지요.
학교와는 정반대 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왜 학교가 학원만큼 못하냐' 고 하더군요.
학교는 분명 잘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은 학부모의 이기심 추구를 학원만큼 못 도와준 것이 아니라,
본분을 망각하고 학부모의 이기심 추구를 돕고 있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하려면 오직 공익에 입각하여 올바른 일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