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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9일 토요일

[교육] 경쟁과 경쟁력

흔히 경쟁을 유발하면 경쟁력이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지 잠시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무제한의 경쟁,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경쟁력이 강한 쪽이 승리한다. 그 다음은? 한번 승리한 쪽은 계속 승리한다. 아니 경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승자가 ‘독식’을 할 뿐이다. 이와 같이 아무 제약 없는 경쟁은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추기지 않아도 경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과당 경쟁을 막아야 그 시스템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경우, 학생과 학부모는 굉장히 큰 것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사회적 지위, 미래의 안락한 생활, 자아실현의 기회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승자독식’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승자가 되지 못하면 사회적 지위도, 안락한 생활도, 자아실현의 기회도 빼앗긴다? 극단적인 경쟁이 일어난다. 패자는 얻고자 했던 것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것까지 잃는다. 반면 승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차지한다. 오늘날 현실이 그와 가깝다.

그렇다면 ‘국민 개인의 기본적 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승자독식’을 막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교육에서 승자독식이란, 대학입시의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 번 서열 높은 대학에 입학하면 그것만으로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동문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하는 식으로 승승장구하는 반면, 그런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훨씬 더 노력해도 기회를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공교육이 그 목적을 이루려면 이런 상태를 막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경쟁을 놔둔 채로 입시제도나 고등학교 교육과정 같은 것을 바꿔서 사교육비나 공교육 불신 같은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면피용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 상태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 경쟁에서 이길 '실탄'이 충분한 자들이 하는 말이다.  정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경쟁을 약화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대학의 서열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논점 일탈이 등장한다.  대학의 서열은 기업들이 명문대 졸업생을 선호하기 때문이므로 기업들이 출신대학에 따른 차별을 안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대학이나 정부 쪽에서 만들어 낸, 책임전가용 멘트다.  내가 기업의 신입사원을 뽑는 담당자라고 생각해 보자.  수많은 지원자들의 능력이나 인성을 속속들이 파악할 방법은 어차피 없다.  주어진 정보로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  그런데 서열 높은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이미 '머리가 좋고, 윗사람 말 잘 듣고,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검증을 거친 것으로 봐야 한다.  출신대학을 고려하는 것은 기업으로서는 너무나 손쉽게 원하는 사원을 뽑을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이걸 어떻게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업에서 마지못해 출신대학을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인성을 보아 뽑는다고 선전을 할 지 몰라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대부분 유명한 대학 출신을 뽑고 구색맞추기로 유명하지 않은 대학 출신자 몇 명을 뽑아 놓고는 '이거 봐라, 우리 회사는 유명 대학 안 나와도 들어올 수 있다' 고 선전할 것이다.

그렇다.  그냥 대학서열을 인위적으로 없애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사실 대학서열의 정체는 '수능 커트라인 서열'에 불과하다.  수능 커트라인만 통일하면 대학 서열을 깨뜨릴 수 있다.  쉽지 않은가?  수능을 자격고사로 하여, 합격한 학생들은 모두 대학에 갈 수 있되 거주지 등을 고려하여 국가가 지정해 주는 대학에 가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대학에 강제할 필요도 없다.  국공립 대학들과 원하는 사립대학들만을 가지고 이런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 '공공대학 네트워크'에 세금을 과감히 투입, 등록금을 무상이나 매우 적은 금액으로 하면서도 교육의 질을 높인다.  그렇게 '공공대학 네트워크'에 못 들어간 학생들만 사립대학에 가는 상황을 만든다면 장기적으로 상당수 사립대학도 이 네트워크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 '공공대학 네트워크'가 고등학교 졸업자의 30%만 수용할 수 있어도 대학의 공공성과, 학교의 공공성은 현저히 개선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처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말해온 것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절차와 예산까지 나와 있을 정도다.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경쟁을 시킨다' 라든가 '기업에서 사람 뽑는 방법이 먼저 바뀌어야...' 따위의 헛소리는 무시하자.  경쟁을 억제해야 사회가 유지된다.   지금의 죽기살기식 경쟁의 원인은 대학서열이다.  그러니 대학 서열을 깨뜨려야 한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교육] 사교육은 돈과 시간과 기회를 갈취하는 사기일 뿐

사교육이 좋은 것인데,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사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교육을 바로 세울 수 없다.
사교육 자체가 학생을 망치고 사회 전체의 공공성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세금으로 월급받는 자들이 사교육비를 줄였다며 생색내기도 한다.
이건 값이 싸니까 사교육 많이 하라는 것 아닌가?
이것은 사교육을 기정사실화, 합리화하는 것밖에 안된다.

사교육은 사회 병리현상이고, 사교육 업자는 불안 심리를 부추겨 가정의 돈을 갈취해 가는, 일종의 사기꾼이다.
사기꾼으로 하여금 한번에 1억 사기칠 것, 5천만원씩 두 번에 사기치게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사람들이 사교육 그 자체를 끊도록 해야 한다.
사교육은 여러모로 담배와 비슷하다(백해무익, 금단증상, 그것으로 돈 버는 자들이 교묘한 술수를 쓰고 있는 점 등).
끊으면 금단증상이 생긴다. 그래서 맨 처음에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하고 있다면 금단증상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
"사기꾼에게 돈을 갖다 바치고 정상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좀 이름 없는 대학 가거나 대학 안 가고 말겠다" 이런 마음으로 끊어야 한다. 물론 실제로 갈 대학을 못가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혹시 그렇게 되더라도 그러면 어때서?
학창시절의 6년은 어른이 된 후의 30년과 맞먹는 가치를 갖는다. 6년의 희생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그 학창시절을 사기꾼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사실 학원의 유일한 기능은 뭔가 배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학문이나 교수법의 문제가 아니다. 심리적인 것이다

일단 돈을 많이 받는다. 돈을 많이 주면 허접한 것도 좋아 보인다(물건도 그렇다). 심리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소비자 우롱이다. 다른 말로... 사기다.

그 다음, 입시가 엄청 복잡한 것이라고 거짓말한다.
입시가 복잡할 게 뭐가 있나?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 떼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원서 쓰고, 필요한 서류 제출하고, 합격 또는 불합격 판정 받는 것이다.
내용은 입시요강에 나와 있고, 대학별로 별로 다를 것도 없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입시를 엄청 복잡해서 학교 선생들도 못 봐준다고 말해서 학원 오게 만든다. 역시 사기다.

일단 학원에 오면, 단정적인 말로 믿음을 심어준다. 이건 꼭 나온다든지, 이런 말이 나오면 무조건 이렇게 하면 된다든지, 이런 말을 많이 쓴다. '믿슙니까' 하는 사이비 종교 수준이다. 실제로 맞느냐는 관계 없다. 어차피 입시가 끝나면 등쳐먹을 수 없으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일수록 사기꾼이지 않겠는가?

학원이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던가?
그런 느낌이 들 뿐이다.
공부하는 방법을 그렇게 많이 가르쳐 주었다면,
학원 다니다 그만두면 덜 불안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더 불안하지 않던가?
오히려 더 모르게 만든 것이다. 그래야 계속 학원을 다니니까.
학원에서 어떤 짓을 하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학원을 다닐수록 머리가 비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소비자(학생, 학부모)는 오직 돈을 갖다 바치는 봉일 뿐인 것이다.
사탕발림과 '믿슙니까' 로 계속 돈을 갖다 바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업무인 것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학원은 사기다.

사교육비가 아무리 떨어져도 소용 없다.
오히려 사교육비가 떨어지면 피해자가 늘어난다.
사교육은 유기농 식품처럼 좋은데 비싸서 못 사는 것이 문제인,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교육은 본질적으로 학생들의 미래를 파괴하고, 부모의 돈을 갈취하고, 사회의 공공성을 갉아먹는 존재다.

당신이 부모라면, 깨달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끔찍히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도 자식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현재 많은 부모들이 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돈을 위해 그것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교육] 정상적인 교육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아는 어떤 분이 청와대에 가서 '수학교육 선진화 방안' 이라는 것에 의견을 제시할 기회가 있으니 의견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다. 수학교육 선진화 방안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내놓은 정책으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수학’,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배우는 수학’, ‘더불어 함께하는 수학’ 이라는 목표를 걸고 입시제도, 교육과정을 고치고 학교에 이런저런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런 식으로 뭔가 '하는 척'만 하면서 학교를, 결국 일선 교사들을 힘들게 하고 학생에게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졸속정책들이 답답해서 아래와 같은 글을 보냈다. 그 자리에서 꺼낼 만한 얘기가 아니어서 아무 역할을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교육에 대한 나의 평소 생각을 요약한 글이기에 여기에 남긴다. 


“훌륭한 교육은 배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교육환경에서 이루어진다.”
- 그레고리 커터니어스, 전 하버드의대 강의병원 교수

라는 말처럼,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학이건 다른 과목이건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배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는 교육환경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사, 학부모, 학생은 시험에서 남보다 앞서는 것을 목적으로 공부하고 또 가르치고 있으며 그 원인은 교육 내부에 있기보다 사회 전체에 있습니다.

배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수학’,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배우는 수학’, ‘더불어 함께하는 수학’ 같은 것들은 굳이 정부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수학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움 자체가 목적인데, 더 잘 가르치고 더 잘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지금처럼 시험에서 남보다 앞서는 것이 목적인 교육환경을 그대로 두고 더 좋은 수학교육을 한다며 시험제도를 고치고, 교과서를 바꾸고,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은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에게 또 한 번의 혼란과 또 한 번의 좌절을 겪게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과목간 통합교수학습 장려’는, 입시에 반영된다면 또 하나의 문제유형이 될 뿐이고, 입시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유명무실해질 것입니다. 대학입시라는 경쟁 대열에서 일찌감치 탈락되어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지겨운 학교생활을 하루하루 이어가는 학생들에게 수학 시간에 G-Learning을 도입하면, Learning 은 십리 밖으로 날아가고 G(Game)만 가지고 시간을 때울 뿐일 것입니다.

훌륭한 교육까지도 아니고 ‘정상적인’ 교육만이라도 이루어지려면 대학 진학 여부에 따라, 또한 대학을 나왔어도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정해지는 지금의 상황을 개선해야만 합니다. 이 문제는 결코 중고등학교 정책의 문제가 아니며 결국 대학 정책(나아가서는 사회 정책)의 문제입니다. 이제 교육 문제를 해결한다며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이나 교육제도를 고치는 척하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교사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방식에도 한계가 왔습니다. 문제가 학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대다수의 국민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학 정책 및 사회 정책 개혁에 나설 때에만 중고등학교 교육 문제도 해결됩니다. 물론 기존 환경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특히 사학재벌)의 반발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축적된 교육정책의 실패를 만회하려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정도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쉽게 실행할 수 있는 순서로)

(1) 학력에 관계없이 어느 정도의 생활비 및 의료비, 주거비, 자녀 교육비가 보장되는 사회복지제도 구축
(2) 대학 교육을 공공자본으로 간주, 예산을 투입하여 등록금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대학을 민주적 통제 아래에 둠(정부 감사, 이해당사자에 의한 대학 운영 협의체 제도)
(3) 대학 정원을 감축, 국민의 50% (더 바람직하게는 30%) 정도만이 대학에 진학하도록 함 – 사회적 자원 낭비와 학력 인플레이션을 방지함. 한편 대학을 나오지 않은 국민이 많아질수록 그들을 위한 일자리도 많아지고 기업의 학력차별도 약해지며 그들을 위한 정책도 나오게 됨.
(4) 들어가기 어려운 대학(소위 명문대학)과 그렇지 않은 대학의 구별을 없앰. 예를 들어 대학 입학생을 공동모집하여 계열별로 수능에서 일정 점수 이상 받은 학생은 합격시키고 가까운 대학에 진학(대학 평준화). 등록금은 평준화 또는 무상화.

‘수학교육선진화방안’에 대한 논의를 하자는 자리에서 위와 같은 이야기는 논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교육 당국에서 계획서를 쓰고 예산을 집행하고, 학교에서 그에 따른다 해도 모든 것을 그야말로 ‘도로아미타불’로 만들어버리는 교육환경입니다. 학생, 학부모, 심지어 교사와 교육 당국의 공무원들조차 ‘서울대 명수’ 세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수학’,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배우는 수학’, ‘더불어 함께하는 수학’ 같은 구호들이야말로 뜬구름 잡는 얘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수십 년간 보아 왔듯이, 이런 교육환경은 중고등학교 교육정책을 바꾸고 교사들이 노력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국가 전체 수준에서 교육환경을 개선하여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력은 국가에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말씀을 드립니다.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교육] 독서교육 - 왜, 그리고 어떻게?

독서는 그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이며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책을 읽음으로써 수학 교과서의 내용을 학습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독서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독서를 통해 얻는 것은 화려한 꽃이나 맛 좋은 열매가 아니라, 튼튼한 뿌리에 해당하지 않을까?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보다도,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상상력, 문제 해결 능력 등, 정신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이 독서의 역할이다. 독서를 통해 수학을 더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기초체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특정한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서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훨씬 중요한, 독서의 원래 기능을 잊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독서는 개인적인 활동이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집단적으로 특정한 책의 내용을 공부하는 경우 그 책은 교과서라 불려야 하고, 그 활동은 독서가 아니라 수업이나 세미나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독서교육’이란 말은 스스로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독서교육은 무엇인가? 즉, 독서교육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활동인가? 독서교육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지속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들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독서교육의 내용이란 독서할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는 일, 그리고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일 정도일 것이다. 그것을 넘는 욕심은 문제를 일으킨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독서교육 관련 소책자에서 본 것인데, 이런 권리들을 학생이나 자녀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저 권리들을 침해하지 않으려면, 독서교육은 좋은 책에 대한 소개, 독서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 독서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등에 그쳐야 한다. 특정한 책이나 특정한 분야의 책을 ‘읽도록 만들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열 가지 권리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군데군데 골라서 읽을 권리
소리 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보바리즘(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공상)을 누릴 권리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중 -

따라서 독서교육은 매우 모호한 활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육이라고 하면 학생들에게 직접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깨닫게 하는 활동이라는 고정관념으로는 독서교육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독서교육은 눈에 보이는 곳, 손이 닿는 곳에 좋은 책이 항상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책이 가까이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학교의 경우 학생이 가장 많이 다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도서관이 있어야 하며, 분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학생들이 자유롭게 책을 열람하고 대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실에도 좋은 책들을 비치하고 계속 ‘업데이트’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투자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는, 좋은 책을 소개하고 빌려주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이런 것도 분명히 ‘교육’의 한 방법이고 그래서 도서관이 교육기관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교육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첫째 오류는, 독서를 특정한 분야의 공부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독서는 정신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이다. 특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그 과목 공부라고 불러야지, 독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독서의 본질을 특정 지식의 획득인 것으로 호도하기 때문이다. 수학에 독서를 접목시키려는 노력은 바람직하지만, 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수학 분야의 좋은 책을 읽음으로써 전체적인 수학적 소양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 두어야 한다. 독서가 수학 공부의 수단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서는 수학 같은 특정 과목 공부보다 더 중요하거나, 적어도 다른 것의 수단이 되어도 좋을 정도로 덜 중요하지는 않다.

두 번째 오류는, 독서의 양과 질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책을 소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서 독서의 양을 늘리고 질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까지는 좋으나, 직접적으로 학생들의 독서에 간섭하는 방식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읽으라고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요한다든지, 이 책꽂이에 있는 책을 다 읽으라고 한다든지, 일주일에 몇 권 이상 꼭 읽으라고 한다든지, 읽은 책에 대해서 꼭 독후감 등을 쓰라고 한다든지 하는 일이 그렇다. 이런 식의 간섭이나 강요는 지적인 폭력일 뿐만 아니라, 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지속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는 마음이 들게 한다는, 독서교육의 목적과 정면충돌한다(일반적으로, 강요는 나쁘다).

세 번째 오류는 독서의 성과를 단시간 안에 양적으로 측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독서의 성과는 특정 과목 공부의 성과보다도 더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그 성과라는 것도 내면의 변화 같은 애매한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에 ‘점수’를 매기고, 결과적으로 ‘등수’까지 매기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 독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독서를 제대로 해 본 적조차 없는 자들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독자들도 자기가 책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리라고 생각한다.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수많은 책들, 다 읽기도 하고, 읽다 말기도 하고, 건너뛰면서 군데군데 읽기도 하고, 가끔 틈틈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림만 보고 말기도 한 그 책들을 통해 얻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지식, 깨달음, 감동, 사고방식의 전환 ... 이런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얽히고설켜 지금의 나를 만든 것 아닌가? 그런 독서의 효과를, 읽은 권수나 그 책을 읽고 나서 쓴 독후감 같은 것으로 측정해서 점수로 환산하려고 하다니... 마치 인간 자체를 점수로 환산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은 독서교육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독서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는데, 물론 학교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상황 항목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체는 바람직할 수 있다. 학생의 독서활동을 파악하면 학생의 관심 분야를 알 수 있기 때문에 학생과 대화의 물꼬를 틀수도 있고, 바람직한 독서에 대한 조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상급학교 입시에 평가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도 입시에 반영되면 곧바로 입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입시에 반영되지 않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독서활동이 상급 학교 입시에서 ‘평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독서 자체가 아닌 독서활동상황란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될 것이고, 봉사활동이 그랬던 것처럼 교사와 학생에게서 막대한 시간을 빼앗는 한편 이름에 정확히 반대되는 효과를 갖는 반교육적 장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인가,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인가? 많은 사람이 당연히 살기 위해 먹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고, 먹는 것은 그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실제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먹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사람도 말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받는 것인가? 어떤 이는 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장사가 되었건 교육이 되었건 그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그 일을 계속하면서 생활하기 위해서 돈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말에는 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직업으로서 하는 일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어느 것이 목적이고 어느 것이 그것을 위한 수단인가,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이 어느 것이고 덜 중요한 것이 어느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가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관은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일에 임하는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인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가? 공부와 대학(학벌)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에 따라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수준별 이동수업, 전국일제고사, 교육과정 개정 등 현안에 대한 입장을 가르는 것도 결국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 곧 가치관이다.

독서교육을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역시 가치관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교육은 문학, 역사, 수학, 과학과 같은 학문의 가치를 오직 (될 수 있으면 알아주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린 전과가 있다. (물론 그것은 농업, 공업, 서비스업을 막론하고 모든 직업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이 사회의 경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과목 공부뿐만 아니라 자치활동, 클럽활동, 봉사활동 같은 것마저도 입시의 수단으로 만들어서 본질과 무관하게 변질시키고 있는데, 어찌 생각하면 그 재주가 신기하기도 하다. 생활기록부에 독서활동이라는 항목이 들어가게 된 지금, 독서가 입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닐까 하는, 매우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런 사태를 막고 정상적인 독서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독서가 무엇인지, 왜 그것이 필요하고 학교에서 독서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 신호등, 그리고 유전자

나는 바른생활 사나이다.
지나다니는 차가 없어도 횡단보도로, 그것도 녹색 불이 들어와야만, 그것도 횡단보도의 오른쪽으로만 건넌다.  하지만 나는 맹목적으로 ‘규칙은 무조건 지켜야한다’ 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느냐를 판단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 왔고, 거기에서 판단의 기준이 나온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이 변해 온 과정을 말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7 살 때의 일부터 비교적 일관성 있게 기억하는데) 빨간불일 때 길을 건너면 안 된다든지, 길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든지 하는 규칙들에 대해 의문 자체가 없었고(있었다면 오싹한 일일 것이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은 아주 ‘나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사건’ 이 일어났다.

그 때는 지금처럼 게임 같은 것이 있지도 않았고 TV 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 친구도 별로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싫어하던 나는 방과 후에는 방에 틀어 박혀 책을 읽는 것이 일과였는데,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과학, 기술, 지리, 역사 등 과목별로 되어 있는 ‘학생 백과사전’ 이 거의 전부였다. 그 중 도덕에 대한 부분은 여러 위인들의 일화를 통해 시간을 지켜야 한다든지(비스마르크), 정직해야 한다든지(워싱턴) 하는 덕목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화들만 재미있게 읽고 정작 거기서 말하는 것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처럼’ 학용품을 산다고 속이고 돈을 타서 과자(그 당시 상당히 인기 있는 과자가 있었던 것 같다) 를 사 먹으려고 할머니(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께 “100원만” 달라고 했다(액수는 정확하지 않다). 할머니께서 “뭐하게” 라고 물으시는 순간, 책에서 읽었던 ‘정직’ 에 대한 워싱턴의 일화 같은 것들이 떠올랐고,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과자 사 먹게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혼나면 혼나지 뭐’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께서 어떻게 대답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때 나는 도덕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생활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때부터 점차 나는 누구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판단에 의해서, 거짓말을 거의 안 하게 되었으며, 규칙 (특히 신호등) 을 지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착한 어린이’ 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은 착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대해 나는 그저 ‘나쁜 사람들’ 이라서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자라면서 나는 과학이나 수학 같은 과목에 관심을 가졌고 과학에 대한 교양서적도 많이 읽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중고등학교 6 년 동안 문학 작품이라고는 ‘죄와 벌’ 딱 한 권을 읽었을 뿐이고 그 기간에 읽은 과학 교양서적은 백 권도 넘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것이 점차 나를 ‘따져 보기 좋아하는’ 학생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과학(수학 포함) 책의 내용이란, 사물에 대해 “왜 그렇지?” “정말 그럴까?”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물음을 가지고 따져 들어가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심지어 딱 한 권의 문학 작품 ‘죄와 벌’ 을 읽을 때도 등장인물 사이의 가족 관계를 따져 수형도를 그려 가며 읽었다).

어쨌든, 따져 보기 좋아하는 학생이 된 내가 ‘사람들이 왜 규칙을 안 지키는가?’ 라는 문제를 따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나쁜 사람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은 허구다. 사람들은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규칙을 어겨 100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적발될 확률이 1/10 이고 적발되면 200에 해당하는 벌(손해) 을 받는다면 규칙을 어겼을 때 이익의 기댓값이 80이 된다. 이것은 규칙을 어기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이므로 규칙을 어기는 경향이 많아지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 적발될 확률을 1/2 이상으로 올리거나, 처벌을 강화해 1000 이상에 해당하는 벌을 주도록 하면 규칙을 어겨서 얻는 이익의 기댓값이 음수가 되므로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둑질한 자는 손목을 자른다’ 식의 가혹한 법률이 왜 생겨났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알게 된 현대적인 진화론이 다시 한 번 나의 사고방식을 바꿔 놓았다. 나는 그 때까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는 성선설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과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진화론에 의하면 지금의 생물들(인간 포함)의 다양한 모습과 행동방식은 유전자 사이의 생존 및 번식을 위한 경쟁의 결과이다.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나 자기의 가까운 친척(공통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게 하는 유전자(하나의 유전자가 아니겠지만)는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유전자와의 생존경쟁에서 져서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양적 전개 과정에 게임이론이라는 수학이 사용된다.)

이 내용을 알고 나서 다시 ‘사람들이 왜 규칙을 어기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답은 규칙을 어기는 것이 인간 본성에 따르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수십억 년의 생존경쟁을 거치면서 극히 이기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은 조금이라도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행동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은 대개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해를 끼치는 행동이 될 것이므로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그런 행동을 억제하는 규칙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모두 규칙을 지킬 때 나 혼자만 어기는 것은 더더욱 엄청난 이익을 가져온다. 이것을 방치하면 점점 규칙이 무시되어 사회가 붕괴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있는 여러 종류의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법률)와, 이기적인 인간들을 ‘세뇌’ 시켜 서로 위할 줄 아는 사회적 인간으로 만드는 제도(교육)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본성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하는 것인 만큼 완벽하게 되기는 어려우며 큰 사회일수록 더 어렵다(작은 사회에서는 한 번 배신자로 낙인찍히면 엄청난 불이익이 오지만 큰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회생활이란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 전체의 공동 이익(공공성)이 충돌하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가 나의 결론이었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는 생각에 비해서 엄청나게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바른생활사나이’ 인 것은 규칙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내 나름대로 ‘따져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도 모르고 규칙을 지키라는 강제를 받게 되면 이기적인 본능에 의해 될 수 있으면 규칙을 어기려고 하게 되겠지만 그것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했기 때문에 거기에 즐겁게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나 책으로부터 ‘따져 보는’ 사고방식과 따져 나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행동을 만든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닐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배운 지식을 토대로 세상을 이해하며, 무엇이 가치 있고 어떤 행동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도 거기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학교에서 도덕이나 과학, 수학, 역사 같은 것을 왜 배우는가? 단편적인 지식 조각들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생각하는 방법을 ‘업그레이드’ 하는 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수학, 과학, 역사 같은 것을 배워서 그것에 비추어 보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세상을 지금보다 훨씬 좁고 얕게밖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알게 모르게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은 지식들로 인해 더 많은 것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냥 먹고 놀고 자는 인생이 아니라, 무엇인가 의문을 갖고 탐구하는(즉 따지는) 인생이 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배워서 생각하는 방법, 세상을 보는 방법을 업그레이드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이야기] 지식과 삶과 교육

이 세상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꼭 두 가지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교사는 아주 적당한 직업이다. 지식을 가까이할 수 있고, 나 자신이 공부하는(즉,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교사는 공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인데 공교육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이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할 수 있다. 왜 공교육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요새 부쩍 많아진 것 같기 때문이다. 공교육이란 무엇인가? 공교육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개인이 알아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거기에 가서 배우도록 하지 않고 이러이러한 것을 가르쳐라, 학교는 어떻게 운영해라 하는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이유는, 의료기관을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게 의료에 관한 법을 만들고 보건소 같은 공공의료기관을 세운 이유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개인의 자선에만 맡기지 않고 복지에 관한 법을 만들고 공립 복지시설을 세운 이유와도 같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 문장은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인데, 말하자면 국가(정부)의 존재 이유를 말하고 있다(실제 이런 이유로 국가를 세웠다는 것은 아니고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선생은 각자 알아서 학원을 세우거나 가정교사로 취직하고, 자식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싶고 가르칠 능력이 되는 부모들은 자식을 학원에 보내거나 가정교사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잠깐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교육은 일부 계층이 독점한다. 교육을 받은 계층의 자녀들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그들끼리 서로 어울리고 교류하면서 학자가 되거나 사업을 하거나 관직에 진출한다.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나머지 가정의 자식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부모의 일을 돕거나 산업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따라서 재산을 모으는 것도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도 거의 원천 봉쇄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 벗을 수 없는 굴레가 됨을 의미한다. 공교육이 없었던 시절의 역사를 보거나, 지금도 공교육을 강제로 시행할 힘이 없는 일부 국가의 상황을 보면 명백한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가출 청소년이나 중퇴생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국가가 아무 일도 안하고 있으면 국민의 상당수가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다시 말해 배고픔을 채울 수 없거나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등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국가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고, 공교육이 그런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교사가 나에게 이처럼 좋은 직업이기는 하지만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세상을 이해하는 일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 기관사(내가 교사가 되지 못했을 때 택하려고 했던 직업)도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공부는 할 수 있고, 또한 지하철이라는 것도 오고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더욱 파괴된 환경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있었던 미래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있는 것 아닌가? 이처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는 사실상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비추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한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왜 위대한가?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공부에서도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빌 게이츠는? 돈을 많이 벌었을 뿐 그가 한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별로 위대하지 않다. 인터넷의 보급은 사회의 발전인가? 그렇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더 쉽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고 있으므로. 경제 발전을 위해 소비를 장려해야 하는가? 아니다. 자원낭비와 환경파괴로 미래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을 시장원리에 맡겨야 하는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의 탐욕을 채우는 대신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더해질 것이 확실하고, 특히 그로 인해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는 회화가 중요한가, 독해가 중요한가? 독해가 중요하다.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공부할 때 필요한 것이 그것이므로. 어떤 것이 옳은지, 또한 어떤 것이 가치 있는지 판단하는 나의 기준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과 대개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제 이러한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통해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현재 공교육은 제 구실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나와 생각을 같이하지만 정작 그 이유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즉, 공교육이 학생들의 대학 시험 점수를 사교육만큼 못 올려주는 것을 가리켜 공교육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의 목적은 점수 올리기나 대학입시가 아닌데 왜 그것을 가지고 비교한단 말인가? 이것은 바둑 기사에게 왜 권투에서 권투선수를 못 이기냐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진짜 문제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에 속는 것인지 알고서도 그러는 것인지 ‘특목고, 자사고’에 간 학생이나 ‘인 서울’한 학생의 수에 연연하고 그 수를 늘리는 것을 학교의 최고 목표로 삼는 공교육 담당자들(교사, 교장, 심지어 교육감)이 많아지는 바람에 실제로 학교가 입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고통을 증가시킨다. 앞서 말한 나의 두 가지 기준으로 보면 ‘극악무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학생들이 고통 받고 있음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실제로 고통을 주는 것은 입시에서 뒤처지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고(이것은 어떤 학생에게 들은 말 그대로다)’, 따라서 입시에 자신의 미래 전체가 걸렸다고 믿는 그들 자신의 불안감과 공포감이다. 사교육 기관은 그런 마음을 부추겨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 한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홍보이고 마케팅이므로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담배회사처럼,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경우다). 학생들은 안 그래도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기 마련인데 사교육기관에 의해 그 불안감이 잔뜩 부풀려진 상태인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줄여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해 주면 된다. 그렇게까지 불안해하거나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 세상에는 경쟁에서 남을 이기는 것이나 잘 먹고 여행 많이 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일도 많다는 것, 그 중요한 것들을 찾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말해 주면 되는 것이다. 진실과 진짜 공부(세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사교육기관의 거짓말과 거짓 공부(문제유형 반복숙달)에 맞서는 것이 바로 공교육이 할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공교육기관이 사교육기관과 사실상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학교가 제 구실을 하려면 학원에 맞서 싸워 학생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하는데, 현실은 어느 쪽이 더 학생에게 고통을 많이 주는지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입시성적에 따라 학교가 망하거나 교장 또는 교사 월급이 깎이는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아무 이유 없이 자기네가 보호해야 할 국민에게 창을 들이댄다(이제는 그 이유를 만들어주겠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꿈이거나, 무슨 심시티같은 게임이었으면 좋겠다. 깨어나거나, ‘리셋’이라도 하게 말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의 경우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 구조나 다른 내용들과의 관계 같은 것이 잘 파악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천재는 아니다. 윤리나 역사 같은 일부 과목은 이해가 잘 안 되어 시험 직전에 간신히 교과서 내용을 외우곤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싫었고 그래서 성적도 잘 안 나왔다. 과학처럼 역사도 수업 시간에 잘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잘 안 되었다. 그 때는 내가 과학에 소질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나중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중학생 때부터 백과사전과 교양서적을 통해 과학 분야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책의 내용은 대부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런 ‘배경 지식’이 그 분야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해 준 것이다. 비유하자면, 배경 지식은 바닷물 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고, 그래서 떨어져 있는 섬들이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과학의 배경 지식은 지리, 음악, 국어 고전 등 다른 분야 과목의 공부에도 도움이 된 것 같은데 윤리나 역사와는 (그 때까지는) 잘 관련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학교 때(그 뒤로도 마찬가지) 교과에 관련도 없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책 읽을 시간은 많고 그 시간을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책을 읽었던 이유는? 습관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왜 하필 과학이었나? 그것은 ‘취향’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런 경험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해 주었다. 내 경우의 윤리나 역사처럼 해서는 절대로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공부해야 한다. 독서의 습관, 교과 내용과 직접 관계가 없더라도 책을 (이왕이면 내용이 좋은 것으로) 많이 읽는 것, 새로 알게 되는 것을 이미 아는 것들과 이리저리 연결시켜 생각해 보는 것, 책에 있는 내용을 나 자신이나 주변 사물에 실제로 적용해 보는 것, 복잡하더라도 파고들면서 생각하는 것,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책 뒤의 해답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다), 아는 것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글로 표현해 보는 것 등이다. 설령 다른 학생이 나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공부했는데 성적이 나보다 훨씬 잘 나왔다고 해도, 나는 내가 했던 방법이 맞다는 생각을 안 바꿀 것이다. 그것이 성적을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진짜 공부’는 장기적으로는 성적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을 이루게 했고, 그렇게 공부한 지식은 나의 일부가 되고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여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가정을 꾸린 다음에는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는데, 차, 에어컨, 사교육 등 ‘돈 먹는 하마’들을 안 키울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고 인터넷 자료를 뒤지며, 혹은 글을 쓰며 공부를 한다. 거기서 새로 알게 된 내용은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의 그물’에 연결되어 내가 세상을 조금 더 넓게,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내가 보기에 공부의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지금 많은 학생들이 하고 있는 것은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 유형을 반복숙달하는 일일 뿐이고, 공부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아직 학생인데 항간에 떠도는 ‘괴담’에서처럼 책 읽을 시간도 없이 학원을 다녀야 하고, 공부(물론 시험에 나오는 과목)를 잘 하는지 감시당하고 관리당하는 생활을 한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학원에서는 입시 문제유형을 나열하고 하나씩 푸는 방법을 반복숙달시켜 줄 것이고, 학교는 그 흉내를 낸다. 섬만 보이고 그것들을 연결시켜 주는 바다 밑의 땅은 보지 못한다. 섬을 하나씩 외운다. 공부(라고 불리는 활동) 자체가 지겹지만 뒤처지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 한다니 할 수 없이 한다. 지식 속에 숨어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 가치관은 공백이 되고 탐욕이 대신한다(즉,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에 간다. 지겹지만 그 방법밖에 모르므로 취업을 위해 또 그런 문제유형 반복숙달식 공부를 한다. 취업을 한다. 나머지 인생도 탐욕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지겨운 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 방법밖에 모르므로 자식들을 학원에 보내고, 감시하고, 관리한다. 지겨움과 탐욕으로 채워진 인생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물론 이것은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어 교과서에서 어떤 글을 읽고, 또는 인터넷 블로그에서 어떤 글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저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이 사교육의 독성을 중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고통 받는 사람은 계속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사교육이 돈벌이에 욕심내지 않고 학교 공부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도와주는 정도의, ‘사교육의 원래 기능’에 만족하면 여러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바둑을 두는데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 집을 채우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일을 제대로 하고 싶다. 제대로 공부하고, 지식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찾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더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학생들을 돕고 싶다. 그런데 교육이라는 이 게임에서 나의 적은 너무 많다. 학교 밖에도, 안에도, 교육청에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2011년 10월 11일 화요일

[과학] 기생충

기생충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기생충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회충, 요충과 같이 사람 몸 안에 살면서 양분을 가로채 살아가는 지렁이 비슷하게 생긴 동물일 것이다. 기생충의 ‘충’은 벌레라는 뜻이므로 기생충은 모두 작은 무척추동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기생충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생물 또는 무생물일 수 있다(벌레가 아닐 때는 기생생물이나 기생체 등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어미 새로 하여금 자기의 알을 부화시키고 돌보게 하는데, 다른 새의 노력을 가로채 번식을 하는 것이므로 기생충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또, 식물 중에는 광합성을 하지 않고 근처에 자라는 버섯으로부터 양분을 빼앗아 살아가는 ‘버섯만도 못한’ 것들이 있는데 이 역시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바이러스(독감 등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스스로를 복제할 수 없지만 다른 생물 세포의 복제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기 복제를 한다. 바이러스를 생물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논란이 되지만 회충이 사람에 기생하듯이 바이러스가 다른 세포에 기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심지어 컴퓨터 바이러스는 실체가 없는 소프트웨어일 뿐이지만 다른 프로그램에게 돌아가야 할 메모리 공간과 중앙처리장치 실행 시간을 가로채 자기를 복제하고 사용자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므로 기생충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일반적으로 스스로는 살아갈 수 없고 다른 시스템에서 유용한 자원을 가로채어 자기를 위해 사용하면서 살아가는(유지, 확산해가는) 시스템을 기생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생충을 영어로는 parasite 라고 하는데, ‘식객(밥을 얻어먹는 자)’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생충이 이용하는 대상, 즉 ‘숙주’는 일반적으로 기생충의 활동에 의해 해를 입는다. 자기 한 몸을 위해 사용해야 할 영양분이나 자원으로 기생충까지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생충의 해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기생충이 자기 목적(유지, 확산)을 위해 어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가 스스로를 더 잘 확산시키려고 우리 몸으로 하여금 그런 반응을 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봐야 한다(물론 바이러스에게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특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더욱 잘 퍼져 나가 오늘날 창궐하고 있다는 것이다). 콜레라처럼 물을 통해 전염되는 병은 설사나 구토를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광견병의 경우는 더 무섭다. 광견병은 주로 동물이 다른 동물을 물었을 때 침을 통해 전염된다. 그러므로 광견병 바이러스는 침을 많이 흘리게 하는 동시에 화학적으로 ‘뇌를 조작하여’ 다른 동물을 물게 만든다. 보통 면역체계가 1-2주일 안에 광견병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그 짧은 기간을 이용해 자신을 다른 동물로 옮기게 하기 위해 숙주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사람의 경우 일단 광견병의 증상이 나타나면 중추신경(뇌, 척수)의 손상으로 100% 죽게 된다(그러나 감염된 후에라도 예방주사를 맞으면, 바이러스가 중추신경에 도달하기 전에 퇴치할 수 있다).

기생충들의 ‘악랄한’ 행태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반고환충의 유충은 송사리의 뇌 바깥에 기생하다가 그 송사리가 새에 잡아먹힐 때 새의 내장으로 들어가 성충이 된다. 따라서 송사리가 새에게 잘 잡아먹혀 줄수록 진반고환충이 더 잘 번식하게 된다. 그래서 유충은 송사리의 뇌 근처에서 화학물질을 분비, 송사리가 수면 근처에서 몸을 뒤집어 배를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경향을 보이도록 한다. 그 결과 송사리가 잡아먹힐 확률은 30배로 늘어나고 진반고환충이 더 쉽게 새의 몸으로 들어가게 된다. 새의 입장에서는 진반고환충 덕분에 송사리를 훨씬 쉽게 잡을 수 있는 셈인데, 이것은 그 지역 생태계의 균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런가 하면 게에 기생하는 소낭충은 아예 숙주를 자신에게 봉사하는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소낭충은 게의 배 부분에 자리잡고 게의 살 속으로 촉수 비슷한 것을 뻗어 양분을 빨아들이는데, 숙주가 된 게는 소낭충의 화학적 조작에 의해 번식 능력이 없어지고 오로지 소낭충을 보호하고 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행동만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식객’이 집을 차지해 버린 셈이다. 암세포는 주인이었던 인체를 배신하고 그 시스템을 자기 자신의 유지, 확산을 위해 사용하여 마구 번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숙주인 인체에 커다란 해를 끼치는 섬뜩한 기생충이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생충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칼 짐머(Carl Zimmer)의 책 「기생충 제국」(이석인 옮김, 도서출판 궁리, 2004)을 참고하기 바란다.

교묘한 방법으로 다른 생물의 몸 안으로 침입하고, 숙주의 면역체계를 바보로 만들며, 뇌를 화학적으로 조작하는 등의 창의적인, 어찌 보면 처절한 생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특이한 이웃에 대해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기생충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잃어버린 퇴화된 생명체도 아니고, 다른 세계에서 온 사악한 괴물도 아니다. 그들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적응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서 혹시 사람이 기생충과 비교되거나, 기생충이 사람과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사람이나 기생충을 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이므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사실 기생충은 결코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복잡성을 가진 시스템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만들었을 지하철 광고판 앞에 살짝 끼워 넣은 조잡한 전단지를 보라. 광고주와 광고 기획자, 디자이너 등 많은 사람의 노력에 살짝 편승하는 그 기생충스러움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속도로가 막힐 때 갓길을 질주하는 차들은 어떤가? 공공의 안전과 효율을 위해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고속도로라는 시스템을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솜씨가 기생충을 닮았다. 우리 사회를 안전하고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세금을 거두는 것인데 사회에서 받을 혜택은 모두 받으면서 그 세금을 가로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탈세범이나 탐관오리들, 불법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의 ‘면역체계’인 수사기관이나 세무기관을 구워삶아버리는 일부 재벌 기업들, 공익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회의 기생충에 불과하면서 사회를 지배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 앞에서 소개한 기생충들 중에서 그들과 흡사하게 살아가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기생충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므로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그런 일들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데 기생충에 대한 지식이 쓸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교육이라는 시스템은 어떨까? 여기서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법에 의해 통제되는 학교교육, 흔히 공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금이나 고속도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교육은 사회 전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내 직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공교육의 목적은 지식과 가치관을 다음 세대로 전달함으로써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동시에 개인의 존엄성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가르치는 수학이라는 학문은 수, 방정식, 함수, 도형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연구하는 것인데, 추상적인 개념은 많은 구체적인 것들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수의 계산 방법을 알아 놓으면 공깃돌의 개수를 헤아리는 데서부터 우주선을 설계하는 일까지 온갖 일에 사용할 수 있다) 수학은 수천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어 왔으며, 따라서 사회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데 수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바둑 동호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알아야 하듯이, 기초가 되는 수학적 지식을 공유하는 것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 진정한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공교육은 자기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소낭충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게처럼 엉망인 상태이다. 기본적으로 교육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인데, 그러기는커녕 사회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것은 교육이라는 시스템에 올라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교육의 방향을 엉뚱하게 틀어버리는 진반고환충이나 소낭충같은 인간들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생충은 아마도 다음에 나열한 자들일 것이다.

- 권력(득표)을 위해 포퓰리즘적인 교육정책(예:고교평준화 해체, 교원평가)을 밀어붙이는 정치인
- 자기 자식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특혜를 요구하고 반칙을 일삼는 일부 권력자들
- 공공 예산 빼먹기 바쁜 일부 교장, 행정실장, 업자들(그 유명한, 관료+업자 카르텔)
- 손님을 끌기 위해 공교육 불신을 조장하는 사교육 업자들
- 무능, 부패, 나태하여 교육을 오히려 방해하면서 월급만 챙기는 일부 교직원, 교육공무원들

기생충이 생기는 것을 그 기생충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기생충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도록 면역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그러고 나서 기존의 기생충을 하나씩 잡아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날이 올까 싶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해 가고 싶다.

2011년 5월 7일 토요일

[교육] 체벌 금지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기 위한 희생적 노력

우리 사회는 폭력에 절어 있는 사회입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폭력을 가르칩니다.
대학에서도 선후배간에 신체적, 언어적 폭력으로 '군기'를 잡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않습니까?

폭력의 가장 큰 문제는 당하면서 느끼는, 굴복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힘(완력 또는 권력)이 센 상대에게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험...
그것은 인생 전체에 주름이 지게 합니다.
자존감이 손상되고 세상을 자신있게 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는 많은 경우 그 굴욕감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폭력을 합리화하는 논리(위계질서, 애사심 등등)를 내면화합니다.

폭력(완력 또는 권력의 부당한 행사)과 굴복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
그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이제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질서를 핑계로 폭력을 합리화하는 정서가 더 강하게 될 만큼, 우리 사회는 폭력에 절어 있습니다.

폭력에 굴복하면서 자라고,
그러면서 위계질서니 뭐니 하며 폭력을 합리화하고,
그래서 고참이 되어, 부모가 되어, 교사가 되어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 때 당하던 폭력을 부모가 돼서 행하고
졸병 때 당하던 폭력을 고참이 돼서 행하고
학생 때 당하던 폭력을 선생이 돼서 행하고
이런 사회가 우리 사회입니다.

이 순환고리를 어디선가 끊어야 하는데,
그나마 제일 약한 고리가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육현장은 교육현장 그 자체를 위해서 폭력(체벌)을 금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사회 전체의 폭력적인 문화(?)를 해체해 나가기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벌을 금지하면 당연히 학교 현장은 혼란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폭력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야금야금 받아들이다가는 도로아미타불입니다.
담배가 필요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논리를 야금야금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지는 뻔한 것처럼, 폭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담배를 끊기 위해 이것저것 모든 여건과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계속 피우는 것이 옳습니까? 그러면 영원히 못 끊는다는 것은 모두 잘 아실 터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단 체벌 전면금지,
그리고 나서 금단증상을 억누르고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 사회는 영원히 폭력에 절어 있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속속 대안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체벌이 있었을 때는 체벌이라는 수단이 있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았던 여러 방안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노하우도 쌓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서 폭력적인 문화가 사라지면,
우리 사회 전체에서도 점차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교사들도 힘들고 학생들도 어수선하고 하겠지만,
참고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물러나면 그야말로 죽도밥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2009년 7월 27일 월요일

[사회] 학벌 서열 체제를 못 없앤다면, 스스로 경쟁에서 벗어나라!

사교육은 왜 시키는가?
물론 공교육에 만족을 못 해서다.
왜 만족을 못하는가? 공교육이 잘 못 가르쳐서?
아니다. 그것과는 관계도 없다. (현재 공교육이 잘 가르친다는 말이 아니다.)
공교육이 '모든 학생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이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데,
공교육은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것을 실시하니까,
아무리 공교육이 잘 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요인이 있다.
자기 자식이 스스로 공부해서 경쟁에서 이기리라고 믿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 공교육이 모두에게 똑같이 실시된다고 해도,
스스로 공부해서 경쟁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왜 가정 경제가 휘청거릴 지경까지 사교육을 한단 말인가?
여기에 사교육 업자의 교묘한 상술(이른바 불안 마케팅)이 끼어든다. 무슨 말인지는 독자들도 잘 알 것이다.

(1) 공교육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
(2) 자기 자식의 경쟁력을 믿지 못한다.
(3) 자식을 더욱 믿지 못하게 해서 돈을 쓰게 만드는 사교육 업체의 상술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기를 쓰고 경쟁에서 이기려 하게 만드는 사회 그 자체에 있다.
그것은 바로 학벌에 따라 사회 경제적 차이가 터무니없이 나는 것, 혹은 그렇다는 믿음이다.

(0) 학벌서열에 따른 사회경제적 차별, 혹은 차별에 대한 믿음

사실 (1) (2) (3)은 극복하기 어렵다.
공교육이 공평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은 평등(기회균등)을 근본적인 이념으로 하는 공화국에서 있을 수 없다(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공화국의 이념에 정면충돌하는, 있어서는 안 될 막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단 기를 쓰고 경쟁하기 시작하면 주위의 모든 집,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이 경쟁자인데, 거기서 초연하기는 어렵다. (경쟁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와 교육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지혜로운 가정도 심심찮게 존재하지만, 이것이 대세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사회 전체적으로 사교육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학벌 서열에 의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것이다.
사실 학벌 서열이란 것은 정말 유치한 것이다.
점수 높은 학생이 많이 지원하면 명문대학이라는 것인데,
학생, 학부모는 작년에 그 학교 '커트라인' 이 높았으면 명문대학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명문대를 나오면 터무니없이 좋은 대접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가정의 미래 설계를 위한 돈을 남김없이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에 쏟아부을 리가 없다.
그렇다. 명문대학의 정체는 고작 '수능 커트라인 높은 대학' 이다.
교육 내용과는 관계 없이 서울에 가까울수록 커트라인이 높다는 건 누구나 아는 건데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 말처럼 세뇌되었나보다.

사회 전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학벌서열체제를 어떻게든 해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수능을 자격고사화해서 수능에 '합격'한 사람은 실제 점수가 몇 점이든 차별하지 않고 어느 대학이든 들어갈 자격을 주는 것이다. (아마도 몇 개 계열별로 나누어야 하겠지만)
그리고 '어느' 대학을 나왔냐는 것은 졸업한 이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만 대학을 나왔느냐만을 묻고 따지도록 한다. 특정 학과에 지원자가 몰리면 '추첨'을 하고, 그 몰리는 학과는 점차 증설한다.
등록금은 모두 통일하거나 무상으로 한다. 무상인 경우 '진급사정'을 철저히 해서 부적절한 학생에게 국가의 돈이 낭비되는 일을 막는다. 돈이 어딨냐고? 그 몇 배의 돈은 어디서 나길래 4대강 사업을 하나? 이거 생각보다 돈 안 든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나라같은 우편향된 사회가 위와 같이 되려면 오바마같은 '좌빨'이 연속 집권한대도 50년은 걸릴 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각자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이 죽일놈의 경쟁체제에 들어가는 것은 쳇바퀴를 돌리며 누군가의 배를 불려주는 노예가 되는 길...
지금같은 시스템에서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남으려면...
경쟁 그 자체를 거부하는 길이 있다.
경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이기는 사람은 극소수다)만 생각하지 말고,
경쟁이라는 쳇바퀴 그 자체에서 벗어나버리는 제3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도 꽤 있다.
그들은 점수에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사교육은 안하지만, 오히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그 이유는 알아주는 대학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정신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 혹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더 큰 공부를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 대학에 들어간다.
그 대학 들어갈 점수가 안 되면... 안 가고 다른 방법을 찾는다.
(사실 대학에 들어가야 그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이 세계를 이해하고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교육비로 쓸 돈이 있으면 그 진정한 공부를 위해서 쓰거나, 미래를 위해 남겨둔다.

경쟁에서 벗어나면, 경쟁에서 이기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승자는 극소수이기 때문에 아둥바둥 경쟁해봤자 같은 결과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사교육비 있는대로 끌어 써서 남의 배나 불리고, 가정의, 따라서 본인의 미래만 더 어두워질 뿐...
제대로 공부하고, 공부에 흥미 없으면 다른 방향으로 미래를 개척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그러다간 비정규직 신세를 못 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사교육비 써 가며 경쟁해도 결과는 대개 마찬가지 아닌가?
사교육비 있는대로 쓴다고 미래가 바뀔 가능성은 1%도 안 될 것 같은데,
그 사교육비라도 아끼면 미래가 좀 더 밝지 않을까?

그리고 진정한 교육(지식)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경쟁에서 이겨서 돈 몇 푼 더 버는 것보다 훨씬 큰 재산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2009년 5월 24일 일요일

[교육] 사교육의 정체

사교육 문제의 원인은 사교육입니다.  학원들이 자기들 손님끌려고 공교육 불신 조장한 것입니다.  그게 성공하여 수요가 폭발했고, 많이 하면 좋은 줄 알고 계속 시간을 늘리다보니 돈이 많이 듭니다.  공교육하고는 상관도 없이 학원과 학부모가 일으킨 일입니다.  사교육비가 부담된다?  왜 학원에 학원비 내리라고 압력은 못 넣지요?  왜 그 중 일부 또는 전부를 그만두지 않지요?  돈 적게 쓰면 경쟁에서 뒤떨어질까봐?  돈 적게 써서 좋은 대학(서열 높은 대학)못 들어갔다고 나중에 자식에게 원망 들을까봐?  그러면서 사교육비를 줄여달라?

교육의 목적은 입시경쟁에서 자기 학생들 앞서게 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육은 그냥 교육입니다.  인류 사회가 이룩한 가치 있는 것들을 전달해 줌으로써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그래서 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교육은 거기에 더해, 교육의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함으로써 신분이 형성되고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막는 기능도 있습니다.  어느 학교가 유명한 대학 많이 보내 주는지 경쟁시킨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중고교 평준화가 그나마 공교육의 명분이라도 세워주고 있는데 아예 합법적으로 그렇게 되면 공교육은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진, 그저 입시훈련이 되어 버리고, 인재 양성은 커녕, 광고에서 사라는 대로 물건 사들이면서, 사교육 업체에서 하라는 대로 자식들 비싼 학원 보내면서, 역시 돈쓰니까 뭐가 달라도 달라 이러기나 하는 좀비같은 무개념 소비자(일명 소비노예)만 양산할 것입니다(지금도 그런 사람 많지만 더 많아진다는 뜻).

지금 학원에서 '우수한 교육' 을 시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학원에서 하는 것은 시험문제유형 반복 숙달 훈련입니다.  이것은 교육의 방법이 아닙니다.  심지어 운전면허 필기시험에서 단시간에 점수 올리기 위해서도 사용하는 그런 방법으로 문학, 수학, 역사, 과학? (영어는 좀 될지도 모릅니다.  학문이 아니니까.) 그런 과목들을 제대로 공부해본 사람은 학원에서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을 알면 절대로 학원에 안 보낼 것 같습니다(제 경우도 그렇습니다).  차라리 점수 덜 받고, 덜 좋은 학벌로 사는 게 낫지, 인생의 큰 고비라고 할 수 있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문제유형 하나하나를 머리에 쑤셔 넣으면서 보낸다?  그것도 몇 년동안?  다른 걸 떠나서 우선 아동 학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할 시간과 의욕과 기회를 빼앗기는' 일입니다.  돈과 함께 말입니다.

교육 문제를 다루면서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사교육의 세례를 받았거나, 현재 자식들에게 많은 사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해 놓은 자기의 행동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가 해 놓은 행동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경향을 가집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자기 자식들을 오히려 사교육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아이들에게 학문들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는 부모들도 꽤 있음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저에게 사교육(입시를 위한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교육 서비스가 아니라 피해야 할 사회악입니다.

사교육은 담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백해무익하지만, 잠시 심리적인 안심을 시켜줄 수는 있습니다.  그 해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될수록 빨리 '끊는' 것입니다.  금단증상이 나타나겠지만, 그것을 극복해야 정상적인 삶(공부)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물론 사교육을 끊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남을 앞서려는 욕심에서 벗어나 '점수 덜 받고, 덜 유명한 대학에 가거나 대학 안 가도 된다' 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도 않으리라 봅니다.  공부를 제대로만 하면 사교육 받을 때보다 즐겁게 공부하면서 성적도 더 잘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단지 충분히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할 뿐...

2009년 1월 17일 토요일

[수학] 학습량이 많다는 의견에 대해

진짜 문제가 뭘까요? 흔히 하는 얘기처럼 초중고 교육과정에 내용이 너무 많다는 것이 정말 문제일까요?  내용을 줄이면 해결될까요?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만 반복되는 거지요.

(1) 교육과정의 내용이 너무 많다는 불만이 나온다.
(2) 학습 부담 경감이라는 명분으로 교육과정상 학습 내용을 줄인다.  교과서가 쉬워진다.
(3) 그런데 입시 문제를 교과서에서만 내면 만점 동점이 너무 많다.  즉, '변별력'이 없어진다.  그래서 '만점 방지용' 어려운 문제들이 나온다.
(4) 입시 문제를 분석한 결과 교과서만으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오고, 입시 문제유형을 따로 연습할 문제집 및 그것을 '연습시켜 줄' 사교육이 필요해진다.
(5) 교과서는 쉬워졌는데도 불구하고 학습부담은 그대로이다(입시경쟁이 그대로니까!).
(6) '입시준비부담' 을 '학습부담'과 혼동한 사람들은 다시 '교육과정의 내용이 너무 많다' 는 불만을 제기한다.  (1) 로 돌아간다.

실제 교육과정의 내용은 그동안 많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입시준비는)교과서만으로는 안된다' 는 의식만 당연시되고 문제집을 만드는 출판사와 사교육 업자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학교가 잘 '못' 가르쳐서 학생들이 사교육으로 몰린다고 뒤집어씌웁니다.)

진짜 문제는 위의 (3) 이었던 것이지요.  즉, 입시에서 학생들을 1등부터 한 줄로 세우기 위해서는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학생들이 만점을 받을 수 있는 문제로는 안 되고  극히 일부 학생들만이 만점을 받을 수 있는 문제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과서가 어렵건 쉽건 입시 문제는 항상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에 맞춰 준비를 하려면 어렵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학습량이 많다는 불만의 실체입니다.

교육과정이 내용이 많다, 어렵다는 것은 옛말입니다.  학문적으로는 중고등학교라는 수준에서 꼭 해야 할 내용마저 '학습량 경감' 명분에 밀려 생략되어 있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대학에서 불만이 나올 정도입니다(물론 이것은 정당한 불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문제가 무엇입니까?그것은 입시에서 학생을 변별하여 한 줄로 세워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대학이 한 줄로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등부터 서열 높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옳은 일일까요?정말 학습량을 줄이고, 학생들이 여가시간에 운동이나 봉사활동, 문화활동, 또는 관심 분야에 대한 탐구활동 등을 제대로 하게 하고 싶으면 먼저 대학 서열구조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학습량 경감이니 사교육비 감소니 아무리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교육] 학부모를 견제하는 것이야말로 학교가 할 일

학교는 공익을 위한 기관입니다.
학부모 개개인의 사익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공익이란 개개인의 사익의 합이 아닙니다.
교육의 이해당사자 중 가장 약자인 학생,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지요.
목소리 큰 학부모들이 아무리 반대한다 해도 옳은 일은 하는 것이 공공기관인 학교의 임무입니다.

옳은 일이란 대개 개인의 이기심을 견제하는 일입니다.
아무 견제 없이 개인의 이기심을 풀어놓으면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어 버립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신호등도 없고 교통경찰도 없이 개인의 이기심에 따라 차를 몰면 어떻게 될지만 생각해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도로교통법이나 '양심' 과 같은 견제장치들은 그런 이기심을 견제하여 공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교는 학부모의 이기심을 견제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입니다.
예를 들어 학부모가 사설모의고사를 원한다면, 그것을 '공익',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올바른 일인가' 에 비추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게 주장하는 학부모들의 '사익'에 비추어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교육기관은 그러지 않아도 되지요.
돈을 내는 학부모들의 이기심을 최대한 실현시켜 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를 정글로 만드는 일을 돕는 것이 그들의 일이지요.
학교와는 정반대 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왜 학교가 학원만큼 못하냐' 고 하더군요.
학교는 분명 잘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은 학부모의 이기심 추구를 학원만큼 못 도와준 것이 아니라,
본분을 망각하고 학부모의 이기심 추구를 돕고 있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하려면 오직 공익에 입각하여 올바른 일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008년 9월 25일 목요일

[교육] 공교육 붕괴의 원인은 이기심

사교육이 아닌, 사교육비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사교육 자체는 받으면 좋은 것인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부자들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이 문제다, 이런 것이지요.
교육의 의미가 '사회적 지위를 올리기 위한 경쟁'에만 있다면 맞는 얘기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 교육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교육을 통해 배우는 문학이나 과학, 역사와 같은 학문들은 무시하는 셈이 됩니다. 왜 학교에서는 그런 과목들을 배우는 것입니까? 경쟁을 통한 선발만이 목적이라면, 예를 들어 '보잉747 정비 매뉴얼' 이나 심지어 '서울 전화번호부' 같은 내용을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그것을 입시 과목으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요?

교육의 본질은 인류의 문화 유산인 문학, 과학, 역사 같은 학문들을 다음 세대로 전함으로써 그들을 이 사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는 그런 학문들의 지식과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우리는 수학이라는 과목에서 많은 현상을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그 추상적인 개념들 사이에서 자체 논리에 의해 법칙들을 끌어낸 다음 그 법칙을 다시 실제 현상에 적용하는, 우리 인간 사회가 발전시킨 독특한 사고체계를 배웁니다(배워야 합니다). 수학이라는 사고체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수학은 우리 문화에 워낙 기초에 자리하고 있어서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사회에 제대로 '입문'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문학, 역사, 과학 등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기를 쓰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이 사회경제적 지위와 연관되면서 그런 본질이 흐려집니다. 특정한 몇몇 대학(소위 명문대)을 나와야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그러지 못하면 평생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면? 당연히 많은 사람이 학문의 원래 가치는 뒷전으로 미루고 대학 입시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면 학생과 학부모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입시 성적을 올리려 하게 됩니다. 공교육은 이런 경쟁을 도와주기 어렵습니다. 공교육은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기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도 다 배우는 것을 배운다면 경쟁에서 앞서갈 수 없지요. 그래서 반칙을 합니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갓길로 달리는 운전자들처럼, 남들이 안 배우는 것을 배우려고 따로 돈을 들여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합니다. 자기만 앞서려는 이기심은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공교육의 취지에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이것이 입시몰입교육의 와중에 공교육이 외면당하는 실제 이유입니다.

2008년 7월 28일 월요일

[사회] 전교조와 빨갱이

전교조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교육이 민주화되어 부자 자식이나 가난한 집 자식이나 똑같은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전교조는 공교육 부실화의 주범이다' 
그들의 많은 다른 말들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공교육 부실화의 원인은 잘못된 입시정책입니다. 부자 자식들 유명대학 들어가게 만들고, 사교육 시장을 확대한 일련의 차별화, 서열화 정책들 말입니다.

전교조는 그 책임을 묻고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인데, 정작 잘못된 정책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공교육 부실화에 대한 책임을 전교조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전교조는 빨갱이다'
'전교조 교사는 실력도 없고 타락했다'
이런 흑색선전으로 말입니다.

전교조는,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교육현장의 부정부패와 전체주의 이념편향에 저항,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 1500명의 교사가 강제 해직되었던 조직입니다.  나중에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대부분의 해직교사가 복직되어 2003년에는 민주화유공자로 인정을 받은바 있는,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에 한 장을 썼던 조직입니다.   여기에 과연 실력도 없고 타락한 교사들만 있을까요?

또한 지금의 전교조는 합법 단체로서 노동조합일 뿐입니다. 회비만 내면 가입됩니다.
실력도 없고 타락한 교사들만 전교조에 가입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그저 공격하려는 자들의 악다구니가 아닐까요?

물론 전교조에도 실력 없고 타락한 교사들,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실력 없고 타락한 교사들이 많고, 그들이 가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뿐이지 전교조에 가입해서 실력 없고 타락한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나쁜' 교사는 전교조 안보다는 밖에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런 식의 말은 흑색선전인 것입니다.

이런 식의 뒤집어씌우기식 흑색선전은 역사와 전통이 깊습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은 숙청을 당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정권을 잡고 독립운동가들을 숙청했습니다.
그 때 사용된 것이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라고 모는 흑색선전입니다.

그 이후 이런 일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여러차례 반복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반대세력에게 붙여진 것은 '빨갱이' 라는 딱지입니다.
박정희 시절에는 멀쩡한 사람(반대자)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도 많이 시켰습니다. 대표적인 게 인혁당 사건이지요.

1980년 광주에서 전두환의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에게는 빨갱이, 폭도라며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정치인도 아닌 시민들이 말입니다.

1998년에서 2007년까지 10년간은 그렇게 탄압을 당하던 사람들이 잠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바로세우고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을 '빨갱이들의 폭동 때문에 생긴 불행한 일' 에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군사정권의 폭력진압' 으로 바로잡았습니다.
빨갱이라며 1500명의 조합원이 해직되었던 전교조는 합법조직으로 인정받고 해직되었던 조합원은 복직과 함께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해방 후 줄곧 빨갱이 타령으로 정권을 유지했던 친일파의 후예들은 위기를 느끼고 그 10년 내내 특기인 빨갱이 타령을 '대한민국 정부' 를 향해 퍼붓습니다. 다른 조직도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빨갱이 정권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정책을 보면 기껏해야 수정자본주의에, 일부 극우적인 면까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정권을 다시 찾았고, 자기들이 '정권을 잃어버렸던 10년' 동안에 이루어졌던 역사 바로세우기와 사회 개혁을 무위로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빨갱이' 운운하는 말의 실상입니다.  주로 '빨갱이', '친북' 이런 말이 나오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흑색선전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김대중이 당했고, 노무현이 당했고, 전교조가 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극히 평화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촛불집회도 그런 식으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로 교통과 장사면으로 많은 피해를 끼쳤다.'
광주에서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하던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거짓말이고 흑색선전입니다.

[교육] 우리 교육의 문제점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을 공교육의 부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이 있지만, 그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원인은 불평등입니다. 다시 말해 차별화, 서열화입니다.

공교육은 왜 존재합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불평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공교육이 없었을 때는 자기 능력껏 자식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러면 부잣집 자식들은 자기들끼리 모이는 명문학교에 가서 지식과 인맥을 쌓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회의 요직으로 진출했습니다. 가난한 집 자식들은 일치감치 교육을 포기하고 가업을 돕거나, 값싼 노동력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런 자연스러운 이치를 부정하고 한사람 한사람이 같은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공교육을 하게 됩니다. 즉,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교육을 강제로 실시한다는 것이지요.

부자들은 불만입니다. 내가 내 능력껏 자식들에게 더 좋은 선생 붙여주겠다는데 왜 막아? 그리고 사회 지도층 자제들끼리 모일 수 있는 명문학교에 입학시켜야 분위기도 좋고 인맥도 형성되는데 왜 어중이떠중이와 우리 자식이 같은 학교에서 복닥거려야해?

가난한 부모도 불만입니다. 아니, 내 자식은 나를 이어서 대장장이 할 건데, 문학? 수학?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 시간에 기술 더 배워야 우리 집에 도움이 되는 건데?

하지만 국가권력은 그런 사정 봐주지 않고 무조건 그 나이의 학생들을 학교에 출석시키고 똑같은 교육을 실시합니다. 거기서 점수 잘 받아서 상급 학교에 가게 되는 학생들은... 신분이나 재산에 관계 없이 능력이 뛰어나고 더 많이 노력한 학생들입니다! 공교육의 목적이 그것이지요.

힘 있고 돈 있고 공공성보다 이기심이 우선인 부모들은 당연히 공교육을 무력화시킬 방도를 찾게 됩니다. 명문대학과 명문고등학교에서 부잣집 자식끼리 만나서 인맥 형성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하기 어렵지만, 그 방법을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대학에 확실한 서열을 만든다.
2. 대학 입시는 객관적인 시험점수를 가지고, 그 점수 순서로 명문대부터 차례로 들어가게 만든다.
3. 시험점수를 올리는 사교육을 활성화한다.

점수 경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명문대 가서 평생 안락하게 살 수 있다고 하면? 당연히 거의 모든 학부모와 학생이 점수 경쟁에 몰입하게 됩니다. (공교육의 뜻을 아는 일부 생각 있는 사람들 제외) 이 와중에 공교육은 외면받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학생에게 똑같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즉, 승부는 사교육에서 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학교 공부는 뒷전이 되고 사교육을 따르게 됩니다.

사교육은 부자들이 유리한 판입니다. 점수를 많이 올려 줄 소위 '인기강사' 들은 몸값이 비쌀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들 중에서도 실력(점수 올려주는 실력) 있고 공공성 개념이 희박한 교사들부터 사교육으로 뛰어듭니다(실제 많은 교사들이 학원 강사로 전업합니다). 학교는 교육과정과 법에 묶여 있지만 사교육 기관은 한껏 효율적으로 점수 올리기를 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시장 원리에 따라 점수 올려주기 실력이 뛰어난 교사는 상당수가 이미 학교를 떠나 학원에 가 있습니다. 공교육은 사교육만큼 점수를 잘 올려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부자들은 자기들이 장악한 언론을 통해 이렇게 선전합니다. '공교육이 부실해서 학생들이 학원으로 몰린다'

이게 교육의 문제점입니다.

학생들이 배움의 열정을 갖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지겹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지겨운 이유는 경쟁에 떠밀려 억지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교육은 배움 그 자체가 목적일 때 이루어집니다.
제대로 된 교육은 배움의 기쁨을 찾아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알아주는'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점수를 따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교육이 안 되고, 열정을 심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제대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상급학교의 서열(즉, 학벌)에 따라 일생이 좌우되는 구조를 없애야 합니다. 성적 순서대로 명문학교부터 채워 가는 식이니 점수, 등수에 올인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려면 대학을 평준화시켜야 합니다.
대학을 다 똑같이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커트라인을 공동으로 정하면 됩니다.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 등은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과 예산까지도 산출되어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 되면 부잣집 자식들끼리 명문대에서 인맥형성하는 꿈이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에 '부자' 들이 그렇게 안할 뿐이지요. 이 때 사용하는 말이 그 유명한 '빨갱이' 입니다.

대학 평준화는 커녕, 고등학교도 차별화하는 정책이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니 특목고때문에 이미 고등학교 평준화는 깨진지 오래고, 그래서 중학교 교육도 파행적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특별한' 고등학교를 더 많이 짓는다고 하니, 중학교 교육도 고등학교처럼 '전원 입시몰입'으로 갈 날도 머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부하라고 몰아붙이는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이 문제라고요?
그들에게 입시몰입교육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정부, 무책임한 관료들이 하는 말입니다.
입시 성적이 평생을 좌우한다는데 일단 자기 자식, 자기 학생의 입시에 몰입하지 않을 정도로 용기있는 학부모, 교사가 그리 흔하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정책을 제대로 해서 그런 해악을 없애도록 노력하는 것이 권력을 가진 기관들의 존재 이유입니다.